이름은 각인되었으나 모습은 그렇지 못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역사상 가장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인물 가운데 하나였지만 실제 모습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가 직접 승인했으리라 짐작되는 당대에 주조된 동전의 초상화만이 실물을 가늠케 한다. 우리는 잘못된 이유로도 그녀를 기억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유능하고 영리한 통치자였다. 함선을 건조하고 반란을 진압하고 통화를 조절하고 기근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았다. 어느 이름난 로마 장군은 클레오파트라가 군사 문제에 해박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여성 통치자가 드물지 않은 시대였지만 홀로 제국을 통치하고 서방 문제에 관여한 고대 세계의 유일한 여인이었다. 지중해 지역에서 그 누구보다 부유했고, 당대의 그 어떤 여인보다 높은 신망을 얻었다. --- p.14
클레오파트라의 이야기를 쓴 로마인들도 고대 로마 역사에 대해 그리 잘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우리의 시야를 더욱 흐리게 한다. 그것은 그들의 이야기 속에 계속 스며들었다. 진기한 것들로 가득한 바티칸에서 넋을 잃은 마크 트웨인처럼, 사람들은 가끔 원본보다 사본을 더 좋아한다. 고전 작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옛이야기들을 이리저리 끌어다 이어 붙였다. 다른 범법자들의 악행을 클레오파트라에게 덮어씌우기도 했다. 그들에게 역사는 다시 쓰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고, 더 근사해진다면 몰라도 더 정확해질 필요는 없었다. --- pp.18-19
그것은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귀환이었다. 그동안 많은 여왕들이 잊혔다가 부활했지만, 흔히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담거나 금붙이로 된 소량의 재산을 운반할 때나 쓰는 질긴 자루 속에서 세상의 무대로 걸어 나온 여인은 클레오파트라가 유일했다. 그녀에게 계략과 위장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이후에도 그녀는 위험에 처한 다른 여인을 관 속에 피신시켰다.
제막식이 카이사르가 보는 자리에서 행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어느 쪽이든 클레오파트라가 ‘위풍당당’(한 자료에서 밝혀진 것처럼)하거나 보석과 금을 주렁주렁 매달거나(또 다른 자료에 실린 주장대로), 어쨌든 조금이라도 말끔한 차림으로 나타났을 가능성은 낮다. 남자들의 상상력, 500년 미술사, 그리고 영국 문학 최고의 희곡 두 편에 저항하면서 몸에 꼭 끼는 아마로 만든 민소매 튜닉을 걸친 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유일한 장신구라면 왕관이나 폭이 넓은 하얀 리본이었다. 그것은 이집트 여인 중에 그녀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 헬레니즘 시대의 통치자임을 증명했다. 그녀는 분명 이마에 리본을 매어 뒤로 묶고 율리우스 카이사르 앞에 나타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클레오파트라가 모든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방법을 꿰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는 수없이 많다. 대체로 대화를 나누면 그녀에게 반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고 알려져 있다. 그 만남을 위한 클레오파트라의 대담한 계략은 그 자체로 마법이나 마찬가지였다. 젊은 여왕이 카이사르도 미처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자신의 화려한 왕궁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가한 충격은 개인적이고도 정치적이었던 것 같다. 특별하고도 소름이 돋는 순간, 두 개의 문명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지나가면서 갑작스럽고 중요한 접촉을 할 때 느끼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 말이다. --- pp.36-37
도시의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6킬로미터가 훌쩍 넘었다. 목욕탕, 극장, 체육관, 왕궁, 신전, 성지, 유대교 회당이 들어찬 진기한 땅이었다. 석회암 성벽이 주변을 에워쌌고 탑들이 여기저기 솟아올라 있었으며 카노푸스 대로 양 끝에는 창녀들이 돌아다녔다. 낮 시간 동안 알렉산드리아는 말발굽 소리, 포리지 장사꾼이나 이집트콩 행상, 거리 공연가, 점쟁이, 대부업자들의 외침으로 들썩였다. 향신료 매점에서 이국적인 향기가 피어올라 축축하고 짠 바닷바람을 타고 거리에 퍼졌다. 긴 다리의 점박이 따오기들이 교차로마다 모여들어 빵 부스러기를 찾아다녔다. 주홍빛 태양이 항구 쪽으로 툭 떨어지고 어스름에 덮이고 난 뒤에도 알렉산드리아는 빨강과 노랑의 소용돌이, 음악과 혼돈과 색채가 어우러진 부풀어 오르는 만화경으로 남아 있었다. 종합적으로 그곳은 극도의 관능성과 고도의 지성이 뒤섞여 사람의 기분을 지배하는 도시였다. 삶의 방식이 우월하고 화려함에 눈이 부신 그곳은 고대 세계의 파리라 할 만했다. 그곳은 돈을 쓰러 가거나, 시를 끼적이게 되거나, 로맨스를 찾거나(혹은 잊거나), 건강을 회복하거나, 힘겨운 10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의 광활한 땅을 정복한 뒤에 다시 결집하는 장소였다. --- p.110
클레오파트라는 원하기만 했다면 피임과 낙태에 관한 많은 조언들을 이용했을 것이다. 그중에는 놀라운 효과를 보이는 방법도 여럿 있었다. 산욾 제한에 관한 문헌만큼 클레오파트라가 넘나들었던 과학과 신화, 계몽과 무지의 심각한 충돌을 보여주는 것도 없다. 그 시대에는 이성적인 생각만큼이나 이상한 믿음도 있었다. 유산을 유도하는 300년 된 히포크라테스의 비법으로, 폴짝폴짝 뛰면서 발꿈치로 엉덩이를 일곱 번 치는 것이 있었다. 그들은 1세기 때의 방법 몇 개를 완벽히 합리적이라 믿었다. 해 뜨기 전 사슴 가죽과 거미 알을 몸에 붙이면 임신을 막을 수 있다고도 했다. 이보다 더 이상한(아니면 더 신통한) 방법은 고양이 간을 왼발에 붙이는 것이었다. 성행위 중에 재채기를 하면 놀라운 효과가 있다는 설도 있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시대에는 악어 똥이 피임 효과로 유명했고 노새의 신장과 환관의 오줌을 섞은 것도 그 못지않았다. 대체로 낙태약에 관한 학문은 피임에 관한 것보다 더 광범위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효과가 증명된 당시 사후피임약의 성분은 소금, 쥐의 배설물, 꿀, 수지였다. 클레오파트라 시대가 막을 내린 이후에는 불이 금방 꺼진 등 냄새가 유산을 일으킨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클레오파트라 시대에 대중적으로 쓰인 약초 치료제도 효과가 증명되었다. 사시나무, 노간주나무 열매, 아위도 피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식초, 백반, 올리브 오일 같은 것들은 최근까지도 쓰였다. 꿀과 오일을 적신 양모로 만든 초기 피임기구도 있었다. 이런 비법들은 주기법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월경 전후가 최적의 가임기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효과가 미미했다. --- pp.134-135
카이사르가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입장하자 전원이 기립했다. 11시 무렵, 그는 새로운 황금의자에 앉았다. 곧바로 헌신적인 친구들이 대다수인 동료들이 그를 에워쌌다. 그때 누군가가 탄원서를 내밀었고 동시에 사람들이 그의 손에 입을 맞추려고 달려들며 손을 뻗었다. 카이사르가 그들의 요구를 묵살하려고 움직이자 탄원자가 그의 말을 끊으며 어깨에 걸린 토가를 홱 잡아당겼다. 그것은 사전에 약속된 신호였다. 그 순간 주위의 동료들이 단검을 빼들고 원을 좁혀오기 시작했다. 카이사르는 몸을 비틀어 첫 번째 칼에서 빠져나왔다. 처음에는 가벼운 찰과상에 불과했지만 뒤이은 충격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모든 음모자들이 이 습격에 가담하기로 동의했고 실천에 옮겼다. 그들은 카이사르의 얼굴, 허벅지, 가슴을 난도질하다가 자기들끼리 찌르기도 했다. 카이사르는 근육질의 목을 돌려가며 ‘거친 짐승처럼 무섭게 소리를 지르며 계속 덤비는’ 그들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고는 마침내 이집트 해안에서 폼페이우스가 그랬던 것과 완전히 똑같이 외마디 신음을 내뱉었고 입고 있던 옷 속으로 고개를 떨어뜨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 p.192
안토니우스의 시종들은 출혈이 심하여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영묘로 데려갔다. 클레오파트라는 2층 창문을 통해 건물 위로 벽돌을 끌어올릴 때 쓰던 밧줄과 노끈을 내려 보냈다. 시종들이 그 밧줄로 흐느적거리는 안토니우스의 몸을 묶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오래 알고 지낸 이라스와 카르미온의 도움을 받아 그를 끌어올렸다. 그런 가슴 아픈 순간을 플루타르코스보다 더 잘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셰익스피어조차 그렇게 하지 못했다. 플루타르코스는 목격자의 증언을 근거로 이렇게 적고 있다. ‘그보다 더 애처로운 광경도 없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죽음과 싸우며 끌어올려졌고, 공중에 매달려 있으면서도 클레오파트라를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여자가 감당하기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긴장한 표정으로 두 손으로 밧줄을 움켜잡고 간신히 끌어올렸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큰 소리로 응원하며 그녀와 고통을 나누었다.’ 그녀는 안토니우스를 끌어올려 안락의자에 눕히자마자 자신이 입은 옷을 찢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록상 그녀가 특유의 침착성을 잃은 두 번의 순간 중 한 번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격한 감정에 어쩔 줄을 몰랐고 ‘그의 고통을 슬퍼하느라 자신의 고통은 잊을 정도였다.’ 두 사람은 거의 10년을 함께 지낸 사이였다. 클레오파트라는 그의 몸에 묻은 피를 닦아내어 자신의 얼굴에 마구 바르고는 가슴을 치고 쥐어뜯었다. 그리고 안토니우스를 주인이요, 장군이요, 남편이라고 불렀다. --- p.407
클레오파트라가 언론의 혹평과 과열된 글, 영화와 오페라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지난 2000년 동안 그녀가 매우 유능한 여왕이었으며 영리하고 상황 판단 능력이 뛰어난 최고의 전략가라는 사실은 가려지지 않았다. 클레오파트라의 인생은 대담한 저항 행위로 시작하여 역시 같은 행위로 끝났다. 그녀를 한 시대를 쥐락펴락한 인물로 소개한 라틴어로 된 한 단편시의 무명작가는 이렇게 묻는다. ‘그 어떤 여인이, 그 어떤 고대의 남자 후계자가 그만큼 위대했는가?’ 그녀는 온몸으로 힘껏 세계의 정치에 발을 들여놓으며 영향력의 범위를 넓혔다. 황혼은 곧 새벽이라고 ?성들을 설득했고 온갖 힘을 동원해서 그렇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천재성을 증명하기 위해 즉석에서 혁신적으로 행동했다. 옥타비아누스나 셰익스피어가 손대기 훨씬 전부터 그녀의 이야기는 이미 화려하고 웅장했다. 그녀는 큰 즐거움을 주는 존재였다. 플루타르코스가 자기 방식대로 수많은 글을 쓰기 전에 그녀는 자신의 민족에게 그와 같은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시종일관 무대를 연출하는 능력으로 보는 사람을 황홀하게 만들었다. 영악하고 기백이 넘치고 상상할 수 없는 부를 누린, 그녀는 제멋대로지만 야심에 찬 정부였다.
--- p.4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