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독자 여러분께 건의 드린다. 이 책을 접할 때 두 가지 시각으로 읽으시라고 권하고 싶다. 우선 ‘명장의 시각’에서 관찰하여 명장이 어떻게 『손자병법』의 관련 내용을 정확히 집행했는지 확인하라는 것이다. 이어서 ‘전투의 시각’에서 관찰하여 승리한 자는 어떻게 승리했고, 패배한 자는 어떻게 패배했는지 비교해보라는 것이다. --- p.10
이 책은 시종일관 실전 사례로 『손자병법』을 검증하고자 한다. 중국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던 10개의 전투, 그리고 절묘한 용병술로 역사 에 이름을 남긴 10명의 명장을 사례로 삼아 복잡다단하고 변화무쌍한 전쟁터에서 『손자병법』이 어떻게 운용되었는지 확인하고자 한다. 10개의 전투는 중국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전환점이므로 이 책은 고대로 부터 근대까지 시간 순서대로 서술했다. --- p.12쪽)
『손자병법』의 첫 편 「계」는 손무가 합려에게 진상한 첫째 글이다. 현대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핵심을 요약한 ‘개요’인 것이다. 손무는 군왕 앞에서 당당했다. 내가 이야기하는 방안을 당신이 받아들인다면 나는 승리를 자신하기 때문에 당신 곁에 머무를 것이고, 내 방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떠나겠다는 것이다.
손무는 중국 역사에서 병성兵聖, 전쟁의 성인, 즉 ‘전략의 신’이 되었는데, 그가 지은 『손자병법』을 능가할 책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그에 못잖게 중요한 요인 하나는 ‘장군이 전쟁을 할 때는 군주의 명령을 받지 않을 수도 있음’을 전형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 p.28쪽)
승리를 서로 경축할 때 장교들이 한신에게 여쭈었다. “병법에서 가르치는 포진의 원칙은 우측과 후방에 산을 두고, 좌측과 전방에 물을 두라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대장군께서는 반대로 포진하면서 오늘 아침에 승리한 뒤 함께 회식하자고 하셨습니다. 어제 그런 말씀을 하실 때 저희는 믿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에 말씀 그대로 되었습니다. 이것은 도대체 어느 병법에 무슨 전술입니까?”
한신이 설명했다. “병법에 다 있는 것인데 제군들은 주목하지 않았을 뿐이네. 『손자병법』에 이런 구절이 있는 것을 기억하는가? ‘절망의 땅에 던져야 보존할 수 있고, 죽음의 땅에 빠뜨려야 살아날 수 있다(投之亡地然後存, 陷之死地然後生).’ 내가 자네들을 이끌고 원정에 나섰는데 오랫동안 함께 훈련한 것도 아니고 또한 병사들은 급조된 오합지졸이라네. 이런 병사들을 데리고 싸우려면 그들을 죽을 곳으로 몰아넣어야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들 도망갈 텐데 전쟁은 무슨 전쟁인가.” --- p.87~88
당나라 때 시인 두보杜甫는 이런 구절을 남겼다. “제갈량의 명성은 우주에 드리우리--- p.諸葛大名垂宇宙).” 제갈량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에 대한 소개는 생략한다. 그런데 역사가 진수陳壽는 정사 기록 『삼국지』에서 제갈량을 이렇게 평가했다. “군대 관리에 강했지만 묘책에는 약했다. 정치적인 능력이 군사적인 능력보다 우월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제갈량의 정치적 재능은 군사적 재능보다 우월했다는 뜻이다. 군사적인 재능으로 말하자면, 군대를 관리하는 능력이 전술 전략을 짜는 능력보다 우월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말하면 나관중의 소설 『삼국연의』를 읽고 제갈량에게 매료된 광팬들께서 강력히 항의하겠지만, 역사가 진수의 평가는 사실 대단히 정확한 지적이었다. --- p.142쪽)
동서양과 고금을 통틀어 명장은 많다. 대부분 전쟁에서 승리하여 명장이 되었다. 그런데 유독 제갈량만은 패전의 뒤처리로 명장이 되었다. 좀 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제갈량은 전쟁에서 패하여 물러날 때 오히려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사실 이것은 대단한 능력이다. 이런 능력을 갖췄기에 제갈량은 비록 전쟁에서 패했지만 군대의 전투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모든 병법은 승리를 추구한다. 그러나 『손자병법』에는 두 가지 중요한 관념이 있다. 하나는 ‘미리 이기라(선승先勝)’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온전하게 이기라(전승全勝)’는 것이다. 『손자병법』의 다음 내용은 ‘온전하게 이김’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 p.156쪽)
이정이 활약하던 때는 손자의 시대보다 전쟁의 형태나 무기 그리고 군별軍別에 있어서 모두 훨씬 복잡해졌다. 이정은 손자가 강조했던바 “장군의 중대한 책임”을 인식하고 각기 다른 지형에 알맞은 새로운 진법을 개발했던 것이다. 이는 다른 장군들이 넘볼 수 없는 경지였다. 그와 동시에 이정은 한신을 대단히 흠모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처형을 앞두고 고함을 질러 목숨을 건진 것이나 당검의 안위를 고려하지 않고 힐리가한을 습격한 것은 모두 한신으로부터 배운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양梁나라의 병력을 운용하여 보공석을 평정한 일은 한신이 위魏나라·조趙나라 병력을 운용한 일과 다를 바 없다. 한신에게 병력은 많을수록 좋다는 ‘다다익선多多益善’의 고사가 있는데, 이정에게도 그런 재주가 있었던 것이다 --- p.197쪽)
서세적은 난세의 불량배로부터 시작하여 이제는 전투로 난민을 구하는 영웅이 된 것이다. 이런 변화를 서세적 본인도 대견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내 나이 열두셋 때는 막가는 불량배여서 사람만 보면 죽였다. 열너덧 때는 난세의 불량배여서 싫은 일을 당하면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였다. 열예닐곱 때는 철이 든 불량배여서 전투에 나 가서만 사람을 죽였다. 이제 나이 스물에 대장군이 되었으니 죽을 지경인 백성을 전투로 구원하고 있다.” --- p.204
악비가 『무목병법武穆兵法』을 지었다는 설도 있지만 지금까지 전해지는 자료는 없다. 겨우 남아 있는 악비의 병법 관련 발언은 “운용의 묘는 한마음에 달렸다”는 이 한마디뿐이다. 훗날 병법 연구자들은 악비가 금나라 군대를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한마음’에 있다면서 ‘일심一心’을 강조하곤 한다. 물론 ‘일심’이란 장군과 사병이 ‘한마음’으로 뭉치는 것 이니 승리의 기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외에도 ‘운용의 묘’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악비의 ‘산병전술散兵戰術’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병력이 야전에 돌입했을 때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전술이 그것이다. (중략) 병력을 풀어놓았다가 다시 끌어모으는 전술인데 ‘적의 예봉을 피했다가 적의 가슴과 등을 치는’ 작전이었다. 어떻게 이런 전술이 가능할까? 악비의 군대는 평소에 그런 전술을 숙달되게 훈련했기 때문 이다. 사병들은 어떻게 흩어졌다가 어떻게 다시 모이는지 눈을 감고도 훤히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 p.222~223
척계광은 병사를 훈련시키는 데에도 탁월하여 명나라·청나라 이후 군사훈련의 전범이 되었다. 그는 병사를 선발할 때부터 기준이 있었는데, 오로지 농민만 뽑았고 도시 출신의 청년은 일절 배격했다. 무릇 얼굴이 하얗고 눈동자를 잘 굴리고 행동거지가 경박한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심사에서 탈락시켰다. 그런 자는 대부분 도시 출신이고, 이익 앞에서 도리를 모르며, 더욱 치명적인 약점은 단합을 해친다는 것이다. 일단 적과 격전이 벌어지면 그런 자들은 본인만 뒤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동료까지 부추겨서 도망치고, 그러다가 잡혀오기라도 하면 이번에는 주둥아리만 살아서 모든 잘못을 동료에게 전가한다고 했다. --- p.253~254
이에 좌종당은 새로운 전략을 제시하여 정적들의 공격을 피했다. 새로운 전략이란 ‘완진속결緩進速決’이었다. ‘완진’이란 천천히 진격하겠다는 것이다. 진압을 서둘지 않고 우선 군대를 정비한 후에 개전하겠다는 뜻이다. 좌종당은 1년 반 정도를 준비 기간으로 잡았다. 그사이에 군사비를 조달하고 군량미와 사료를 비축했다. 아울러 군대를 정리하고 불필요한 인원을 내보내어 전투력을 높였다. 심지어 자신이 키웠던 상군마저도 칼질했는데, 불요불급한 부서를 통폐합했으며 출정을 원치 않는 병사에 대해서는 명퇴금을 지급하고 귀가 조치했다.
--- p.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