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은 흔히들 유명한 회화는 진지한 예술가가 진지한 예술적 태도로 완성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땅히 옷깃을 여미고 감상해야 하고, 발표 당시에도 마찬가지로 모두가 옷깃을 여미고 보았을 것이라고…….”
『무서운 그림』 의 나카노 교코가 들려주는 명화의 진실
현대에 와서 미술은 예술의 한 영역이자 고급스러운 교양이다. 하지만 TV나 스크린과 같은 영상 매체가 없던 시절 미술은 시각적 오락의 총체였다. 화가들은 왕후 귀족과 같은 주문자들의 요구에 맞는 그림을 그리거나 자신의 오락적 해석을 담기도 했다. 그리고 때로는 인생무상이나 실연에 대한 상처, 자신을 알리고 싶은 욕구와 같은 개인적인 가치관을 짙게 투영했다. 그러니까 늘상 교훈적이고도 깊은 사색을 요한다고 생각했던 명화에게 우리는 속은 것인지도 모른다.
가장 무서운 건 천재지변도, 유령도 아닌, 바로 살아 있는 인간이라며 당시의 시대상을 담은 명화, 그 속에 담긴 인간의 섬뜩한 심리를 파고든 독특한 컨셉의 책으로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던 『무서운 그림』의 저자 나카노 교코는 와세다 대학에서 서양 문화사를 강의하는 교수로 풍부한 교양 지식을 바탕으로 명화를 읽어내는 것으로 많은 팬들을 확보하고 있다. 그는 이번에도 역시 명화를 감상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명화가 건네는 말에 쉽게 속지 말라며 신화를 담고 있을 때는 특히나 눈을 부릅뜨라고 말이다.
“유명한 회화 작품은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생경하고 의미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한데 흔히들 해설이나 이론을 통해 공부하면 이들 명화에 대해 잘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명화에 대해 명료한 인식을 얻게 되고, 이것이 세상에 대한 명료한 인식으로도 이어질 거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꼭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정도로는 헛발질을 할 공산이 크다. 명화는 보습학원의 교재도 아니고 전자제품의 설명서도 아니다. 유럽의 회화는 특수한 물적 조건과 관례와 전통이 복잡하게 조합된 결과물이다. 명화를 둘러싼 담론을 찬찬히 살펴보면, 명화는 자신과 세상에 대한 명료한 인식을 허용하기는커녕 해석을 거부하고 중요한 의미를 숨기며 짐짓 딴청을 피우곤 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명화들 각각의 의미를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살펴보기만 해도, 명화를 대하는 일이 결코 녹록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명화가 관객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심지어 거짓말을 할 때, 그 수단은 종종 허구로 가득한 신화이다. 신화를 담은 명화를 살피는 일은 그래서 까다롭고도 흥미롭다.”
- 미술사가 이연식, 「역자의 후기」 중
당신이 알고 있는 그리스 신화는 어떠한가?
명화로 읽는 매혹의 그리스 신화
성경과 함께 서양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영원한 고전으로 꼽히는 그리스 신화는 시대를 거쳐 전해 내려오면서 교훈적인 측면보다는 유희적인 면이 강해졌다. 그래서 모든 소설의 원형이자 보고로까지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고전이기에 쉽게 대할 수 없는, 진지하고도 엄숙한 느낌이 감돈다. 특히나 루벤스, 틴토레토, 보티첼리 등과 같은 최고의 화가들의 명화를 통해 살펴본다니 더욱 옷깃을 여미고 감상해야 할 것만 같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독자들의 예상을 보기 좋게 무너뜨린다. 명화 이면에 숨은 진실을 찾는데 탁월한 시각을 보여준 저자가 읽어낸 신들의 이야기는 어떨까?
“화가들 자신이 흥미를 느꼈을 뿐 아니라 그림을 주문한 왕후 귀족과 부유한 계급도 이를 원했습니다. 풍성한 이야기를 즐기려는 지적 욕구, 신들의 모습에 빗대어 묘사된 인간의 육체에 대한 찬가. 중산 계급이 그림의 구매자가 된 근대에 이르기까지 신화는 수없이 그림에 담겨 왔습니다. 이 때문에 서양화를 보면서 그리스 신화를 피할 길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괜히 긴장하거나 ‘예술을 감상한다’며 격식을 갖출 필요도 없습니다.”- 「저자 서문」 중
‘판도라의 상자’를 다룬 〈모두가 여자 탓?〉 이라는 챕터를 살펴보자.
그리스 신화의 전거 중 하나인『신통기』저자 헤시오도스는 「판도라의 상자」이야기를 두고 타락을 가져오는 종족, 남자에게 무서운 고통을 안겨주는 종족인 여자가 이렇게 탄생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상 이 이야기를 보면 어디에도 판도라가 고통을 안겨줄 만한 성질 나쁜 여자로는 보이지 않는다. 열어보지 말라는 상자를 열어보고 싶어 하는 것은 누구나 느낄 만한 유혹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렇게 이의를 제기하며 위대한 작가인 헤시오도스도 편향적인 시선을 가질 수 있는 한 인간임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남성 중심적인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판도라의 상자를 제재로 한 유명한 그림인 장 쿠쟁의「에바 프리마 판도라」를 보면 일찍이 이브였던 판도라라는 뜻의 제목부터가 그꾷하다. 인간이 낙원으로부터 추방된 화근도, 인간들이 온갖 괴로움을 안게 된 것도 다 여자 탓이라는 인식이 드러난다. 그림 속 판도라의 발이 갈라진 것도 악마의 발이 이렇게 생겼다고 여긴 당시의 미신을 반영하고 있는 것도 그러하다.
이 그림에서 신화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장치, 붉은 항아리가 눈에 띈다. 붉은 항아리는 판도라가 손으로 덮고 있는 항아리보다 높은 위치에서 위용 있게 배치되었다. 작품이 나온 당시가 프랑스 왕인 앙리 2세가 파리로 입성했을 때라고 하니 항아리는 절대자, 그러니까 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 그림은 왕을 찬양하기 위한 용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봄직하다. 이처럼 저자는 역사학자다운 해설을 통해 급기야 앙리 2세가 맞게 되는 비극적 운명(스코틀랜드 근위대장과의 마상시합에서 창이 눈을 꿰어 고통 속에 죽음을 맞이함)과 그 운명을 예견하여 일약 스타덤에 오른 노스트라다무스의 이야기까지 언급한다.
‘이카루스 이야기’를 담고 있는 〈아비의 마음을 자식은 몰라〉라는 편에서는 피터르 브뤼헐의 작품이 흥미롭다. 넓은 바다에 배가 떠다니고 그림 앞쪽에는 농부가 한가롭게 쟁기질을 하고 낚싯대를 기울이는 남자의 모습도 보인다. 언뜻 보아서는 도무지 이 그림에서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하늘 높이 나는 바람에 날개가 떨어져 추락사한 이카루스의 이야기를 읽어낼 수 없다. 그저 한가로운 프랑드르의 풍경화 같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낚시를 하는 남자 앞에 버둥거리는 다리와 흩어진 날개가 보인다. 바로 이카루스가 바닷속에 빠진 직후의 모습인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도전이라도 관객의 관심이 이렇게 없으면 낭패다. 저자는 세상이 의외로 젊은이의 도전에 냉담하다는 것을 읽어낸다. 그리고 또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브뤼헐이 살던 시대의 플랑드르는 스페인 합스부르그가의 압정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반란이나 밀고, 처형이 일상사였던 것이다. 그런 분위기를 반영했다면 이 그림은 전혀 다르게 와 닿는다. 바다에 추락한 젊은이가 압제 세력에 대항하다 실패한 이름 없는 영웅이라면? 이카루스를 외면하는 주변 사람들은 피해가 자신에게까지 미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당시 플랑드르 국민의 모습일 수도 있는 것이다.
표지에 쓰이기도 한 피그말리온 신화를 제재로 한 장 레옹 제롬의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는 자신의 조각상을 사랑해서 아내로 삼은 피그말리온 왕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화가의 시선이 느껴진다. 일단 이 사랑이 병적이라고 보는 장치들이 이곳저곳에 깔려 있다. 오른쪽 선반에 올려진 입을 벌린 가면은 고대 그리스의 희극과 비극에서 쓰이던 것으로 이 사건 자체가 희극이기도 하지만 비극이기도 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왼쪽에 놓인 타나그라 인형은 당시 타나그라 지방에서 묘지의 부장품으로 쓰이던 것이므로 이 조각상이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작업실 자체가 왕궁에 있는 곳이라기에는 너무도 어둡고 지하실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 곳에서 죽은 이와의 사랑이라니 너무 음침하다. 게다가 신화와 달리, 조각상은 피그말리온의 키스를 받고 있는 수줍은 여인의 모습이 아니라 제 쪽에서 몸을 구부려 열정적으로 키스를 퍼붓고 있다. 세기말 예술에 크게 유행했던 팜므파탈의 모습을 그린 것은 아닐지 저자는 의문을 갖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후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 사이에 나온 증손인 미라는 아프로디테의 저주를 받아 아버지에게 욕정을 품게 된다.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만든 사람을 사랑하고 그의 핏줄인 미라는 자신‘을’ 만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웃지 못할 비극을 낳은 것이다.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죄악의 씨앗을 배게 된 미라는 아도니스를 낳는데, 사태를 이렇게 만든 아프로디테가 그를 사랑하게 된다. 비극적인 운명이 고리처럼 돌고 도는 이야기다.
명화를 통해 그리스 신화가 펼쳐지기도 하고 신화와는 다른 명화를 통해 역사와 고전, 다른 예술의 영역을 넘나들며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뻗어 나간다. 명화라는 관문을 통해 신화와 인문학을 여행하고 독자에게 나름대로의 여행을 떠나기를 권하는 책인 것이다.
| EDITOR'S COMMENT |
짧은 시간에 에센스만을 취하려는 현대인의 구미에 맞춘 책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것이다. 통째로 정독하기는 다소 부담스러운 그리스 신화를 명화를 통해 에피소드 별로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명화의 거짓말』은 신화가 알고 보면 우리 인간사와 별반 다르지 않아 친숙하게 느낄 수 있는, TV 드라마보다 재미있는 이야기이며 명화 역시 당시의 상황과 심리가 복잡하게 묻어 있어 끝없는 수수께끼와 같은 즐거운 재미를 줄 수 있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그리스 신화를 읽은 척을 할 수 있는 책이 아니라 그리스 신화라는 거대한 바다에 빠져들고픈 유혹을 일으킨다.
“이 책은 꿀럽의 명화를 통해 신화를 들여다보는 책이다. 그런데 이 말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 책은 명화들의 석연찮은, 괴상한, 때로는 유쾌한 면면을 살피면서 이들의 배후에 자리 잡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조명하고, 신화가 다른 예술적, 문화적 기제와 실타래처럼 뒤엉킨 명화들 속에서 이야기의 가닥을 능숙하게 뽑아낸다. 이 가닥을 따라 그림과 신화의 세계를 굽이굽이 돌아가다 보면 독자는 어느 샌가 명화의 뒷면을, 신화의 이면을 엿보게 된다.”
- 미술사가 이연식, 「역자의 후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