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전반기를 둘째 아들 돌탕이 되어 살았다면 이제 남은 후반기는 맏아들 돌탕이 되어 살고 싶다.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마음을 품고 그 마음으로 살아보고 싶다. 은혜로 시작했으니 은혜로 살고 은혜로 사역하고 은혜로 인생을 마치고 싶다. 종교개혁 500주년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는가 싶더니 지금은 시들해버렸다. 종교개혁이 무엇인가?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그 은혜를 회복하는 운동 아닌가?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모든 것이 그 분의 은혜 때문임을 알 때 개혁이 시작되는 것 아닌가? 은혜를 회복하지 않고 진행되는 행사들은 그저 피곤한 일일 뿐이다. 은혜가 개혁의 본질이다. 은혜를 회복하는 것이 시급하다. 사역도 은혜로 하면 행복해지고, 고난도 은혜가 있으면 이길 수 있다. 은혜는 우리를 경쟁이 아닌 협력의 길로 인도한다. 은혜는 나만의 길을 가도록 격려하고, 성공과 실패에 흔들리지 않게 한다. 바로 은혜가 본질이기 때문이다.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 pp.12-13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기도하는 종으로 살고 싶다. 기도 없이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인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게 기도의 사람이 되라고 권면한다. 기도 외에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기도만이 참된 자신을 발견하게 해주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 다짐한다. ‘내 평생 기도하는 종으로 살리라.’ --- p.39
세상의 변화는 중심이 아닌 변두리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실제 강물이 어는 것도 가장자리에서부터다. 조국의 산하에 봄기운이 몰려오는 것도 도시 중심이 아닌 저 바닷가 외딴 섬에서부터다. 가을도 먼 산에서부터 내려오지 않던가. 세상이 보기엔 변두리에서 소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달리 보시는 것 같다. 그들이야말로 세상을 변화시킬, 하나님 나라 건설에 기둥이 될 사람들, 한 길 가는 제자들이다. 내게 주어진 이 목회와 선교의 길을 생각해본다. 주님이 특별히 다른 길, 다른 곳으로 나를 부르시지 않는다면 남은 인생 끝까지 이 길을 걸어가고 싶다. 그러다 보면 뜻하지 않게 해외 목회와 선교에서 자그마한 열매가 선물처럼 주어지지 않을까. --- pp.50-51
사역의 바운더리뿐만 아니라 사람을 포용하는 바운더리까지도 넓은 넉넉한 목회를 해야겠다. 그 누구라도 정죄보다는 포용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목회, 그러면서 그들의 삶이 점점 더 회복되고 좋아지도록 인도하는 멘토링 목회, 그것이 진정 주님이 원하시는 목회일 거라고 생각했다. --- p.79
하나님께서 전혀 준비가 안 된 우리 연약한 팀의 발걸음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루신 것이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그 크고 놀라운 은혜의 열매 앞에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낭트와 서부 프랑스에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오길, 예배와 사명이 회복되길 기도했는데, 놀라운 역사의 현장 앞에서 그만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준비된 자든 준비가 안 된 자든, 가난한 자든 부요한 자든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위한 부르심에 무작정 순종하며 덤벼드는 자들에게 당신의 영광, 당신의 임재를 드러내고 마신다. --- p.101
박 선교사는 “우리의 사명은 마중물이 되는 것이지요”라고 했다. 우리는 멋진 만찬을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유럽에서 감당해야 하는 사명을 ‘마중물 역할’이라고 정의했다. 2000년 기독교 역사와 500년 개신교 역사를 꽃피웠던 유럽 땅에서 동방의 고요한 나라 출신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선교적 역할은 무엇일까? 이 땅의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은 다 변질되어 죽었으니 갈아엎고 우리가 가져온 신앙과 영성을 심어야 한다는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이미 이들이 경험했고 지금도 가지고 있으나 잠들어 있는 영적 자산들을 새롭게 뽑아내는 마중물의 역할을 겸허하게 감당하는 것이 우리를 이 유럽 땅에 보내신 주님의 뜻일 것이다. --- p.139
고대 철학자 플라톤은 이 양면성을 ‘파르마콘’(pharmakon)이라고 명명했다. 이 단어는 약(藥)이라는 뜻과 독(毒)이라는 뜻을 다 가지고 있다. 경우에 따라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약국을 뜻하는 영어 ‘pharmacy’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됐다. 종종 약국 간판에 독의 상징인 독사를 그려 넣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세상은 어쩌면 파르마콘 세상 아닌가. 내가 하는 일이 때론 누군가에게 약이 되기도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독이 되기도 한다.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선교활동이 식민지의 길잡이 노릇이 될 줄은 선교사들도 미처 몰랐을 것이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인생,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목회도 그로 인해 독이 될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지 않을지 조심스러워진다. 그러기에 자기 반성 없는 삶은 양면성이 아니라 이중성이 되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일, 내가 걷는 이 길이 이중적이진 않은지 마음이 무겁다. --- p.187
인생의 가치, 인생의 힘은 죽음이라는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준비하고 맞이하느냐에 달려 있다. 세상의 영웅호걸들은 하나같이 그 순간을 기쁘고 장엄하게 맞이했다. 그 순간에 결코 비겁하지 않았다. 나에게 마지막은 언제일까? 나는 어떻게 마지막을 장엄하고 숭고하며 아름답게 맞이할 수 있을까? 그것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오늘 이 하루가 내게 마지막 순간, 마지막 날이라고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앞서 간 많은 사람들의 즐비한 무덤들처럼 나도 언젠가는 그 사이에 저렇게 묻히게 된다는 겸손함에서 준비는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 p.201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일을 친구인 우리들과 나누시겠다고 하셨다.(요 15:15) 그리고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까지 내주셨다. 나는 누구보다도 관계의 폭이 넓고 친구가 많은 편이다. 본래부터 친구를 좋아하는 성격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고 희로애락을 나누며 생명까지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는 과연 얼마나 될까? 아니, 내가 먼저 그 친구 한 명 한 명에게 내 말 못할 고민을 털어놓으며 나를 내어주고 있는가? 쉽게 긍정할 수 없는 질문이다. --- p.249
한낱 미물인 독수리가 찾아와 앉았다가 떠난 성은 입은 나무라 하여 기념하고 보존하고 귀하게 여긴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 오셔서 구원해 주시고 고쳐 주시고 새롭게 해 주신 인생이라면 도대체 얼마나 더 귀한 것인가! 성령께서 오셔서 몸소 거하시며 우리 몸을 성전 삼고 주인 삼아 주신 우리 인생은 얼마나 소중한 존재란 말인가! 성은 입은 인생, 성은 입은 우리 몸이 아닌가!
--- p.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