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예술은 미완성 속에 있지. 이게 무한한 매혹이야
“여름 끝엔 태풍이 있어 참 좋아. 천둥번개, 비바람… 이런 거.”
질풍노도의 삶을 살아 온 고은 시인의 첫 마디였다.
천둥번개인가하면, 호젓한 바닷가에 누워있는 물거품이고, 포효하는 사자인가하면, 어느새 천진한 세 살배기 아이처럼 웃고 있는, 이 시대의 큰 산, 거목이라 불리는 그의 시선을 따라 가니 응접실 창문 밖 나뭇잎들이 여름장마비에 초록 물을 떨구고 있다. 머지않아 알찬 열매를 수확하며 ‘지난 여름은 위대’했노라 할 터.
한국문단에서 태풍의 눈이었던 그의 초인적 열정이 이루어낸 ‘민족대서사시’《만인보》(전 30권, 총 4,001편)는 그의 지난 여름이 위대했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 국내외의 찬탄이 쏟아지고 있다.
1980년 육군교도소 특별감방 7호에 수감 중 훨훨 나는 나비떼 처럼 찾아온 시 구상으로 1986년에 시작하여 25년 만에 완간한 역작이다.
고조선부터 광주항쟁에 이르기까지 5,600여 명의 인간 군상들에 대한 삶과 죽음, 희로애락과 사연들을 개인적, 민족적, 역사적 진실, 혹은 숨겨진 비화를 바탕으로 풀어 낸 ‘한민족의 호적부’이며 ‘거대한 벽화’라 하겠다.
“모든 예술은 미완성 속에 있지. 이게 무한한 매혹이야. 시대와 상황에 따라 계속 변모하는 인간을 규정한다는 것 자체가 미완성이라《만인보》는 그런 의미에서 미완성이야. 30권은 약속이고 언제든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또 써야지. 너무 많아. 역사 속에 인간들이 구더기, 구더기처럼 많아.”
시 같은 언어들이 깃털처럼 내려앉는다.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그가 그동안 출간한 책들과 전시회를 마친 유화 그림을 등지고 앉은 모습은 그대로 한 편의 역사이고 시이며 그림이었다.--- 폐허의 고아로 태어나 우주의 언어를 구걸하는 천재 시인 ‘고은’ 중에서
나는 이기주의자지, 아주 지독한 이기주의자
“인생은 3박자가 맞아야 성공했다고 할 수 있지. 난 아니야. 첫째, 나는 결혼해선 안 될 사람인데 결혼한 게 첫 번째 실패고, 둘째는 내 자식들한테 아버지로서 영향을 준 게 없어. 즤대로 크고 즤대로 벌어먹게 했으니까. 셋째, 내가 술사고 밥사고 하니까 모두 내가 부잔 줄 아는데 내 수중에 시골 가서 흙집하나 짓고 살 돈이 없어.”
한국현대문학사에 하나의 축을 세운《객주》의 작가 김주영은 작가로서 성공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굳이 인생을 들추며 성공을 부인했다. 겸손이라기보다는 아직 그에게 ‘마지막 작품’이 남아 있는 까닭이라고 여겨진다.
“20년 전부터 멋진 연애소설을 쓰고 싶은데 안 되는 거야. 지난 사랑을 돌이켜보면 내 감흥이 없어. 진실된, 목숨조차 기꺼이 바칠 수 있는, 모든 걸 포기하는, 그런 사랑을 못해 본 거지. 내 생모도, 의모도, 아내도, 스쳐간 여자들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어. 이기주의자지, 아주 지독한 이기주의자.”
오직 글쓰기만 목숨 걸고 사랑한 사람, 단 한 줄의 문장을 위해 지구 끝까지 걸어서도 갈 사람, 그래서 ‘길 위의 작가’라는 수식어는 함부로 붙여진 것이 아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봄기운이 무르익는 4월 9일에서 11일까지 제주 올레길을 그와 함께 걸었다.---내게 글쓰기는 문둥이와 함께 자라고 강요받는 것 ‘김주영’ 중에서
시는, 단지 죽어 가는 데 조금 위안이 될 뿐
울지 말라며 건넨 손수건에 묻혔던 설움까지 쏟아 놓게 되는 것은 인간의 공통된 심사일거다. 그러고 나면 비개인 하늘처럼 투명한 마음자리로 고이는 그 무엇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라 했던가. 감동과 위안을 넘어 치유의 힘을 지닌 시에서 예술의 진정성을 다시 목도하며 이 시대의 대표 시인 중 한 사람인 정호승을 봉은사 대웅전 앞에서 만났다.
사랑의 시인에서 이제는 위안의 시인으로 더 많이 불리는 그는, 움푹 깊어진 햇살 아래 나뭇잎마저 제 몸의 부피를 줄이고 있는 경내 숲길을 닮아 있었다. 젊은 날의 결기 있던 표정은 사라지고, 흰
머리의 노신사에게선 ‘무위’의 여유와 편안함이 묻어났다. 한민족의 전통적 정서와 율격으로 민중 속에 깊이 들어와 그리움, 기다림의 초극을 노래하던 그가 아홉 번째 시집《포옹》에선 인간의 보다 근원적인 존재에 대한 깊은 사유와 성찰로 새로운 지평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정작 시인은 “나는 시를 몰라요.”라고 말한다.
“삶이 뭔지,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시를 어떻게 알겠어요? 단지 스승이셨던 조병화 선생님께서 ‘시는 명예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다. 다만 죽어 가는 데 조금 위안이 될 뿐이다.’라 하
셨는데 그 말씀에 깊이 공감하고 있어요.”
‘살아가는 데’가 아니라 ‘죽어가는 데’라는 말귀에 온몸이 감전된다. 죽기 때문에 완성되는 삶의 편편마다 우리는 어떤 위안을 갖고 있는지…… 아직 자기 나름의 위안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의 산문
집《위안》에서 ‘위안’을 수혈 받아 보는 것은 어떨지.
---산다는 것은 낡은 의자 하나 차지하는 일이었을 뿐 ‘정호승’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