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가들은 무의식이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저마다의 독특한 방식으로 상상하게 만든다고 인식한다. 그러므로 정신분석 역시 무의식의 작용에 대해 알아차리게 함으로써 환자로 하여금 현실을 덜 왜곡된 모습으로 바라보게 한다는 점이 불교와 다르면서도 비슷한 점이다.
불교와 정신분석의 한 가지 유사한 측면에 대해 펠드(pelled, 2007)는 정신적 성장을 절대적 진리, 즉 대문자 ‘T’로 시작하는 ‘Truth’와 연관시켜 바라보는 점이 정신분석과 불교의 공통점 중 하나라고 말한다. 우리는 모두 진리를 추구하고 진정한 현실을 추구하는 데 끝없는 탐색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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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직업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신기해하며 이렇게 묻는다. “정말 정신분석가예요? 프로이트처럼?”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네, 그런데 꼭 그런 건 아니에요.”
현대 정신분석을 초기 프로이트학파의 사고와 동일시하는 것은 21세기에 출시된 포드의 신형 전기 자동차를 20세기 초에 출시된 포드 모델 T 기종과 비교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뿐 아니라,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가 전부 포드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신분석이라고 해서 프로이트의 이론만 있는 건 아니다. 정신분석은 수많은 이론, 철학, 기법을 포괄한다. 많은 사람들은 정신분석과 심리치료의 차이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래서 흔히 “모든 문제가 과거에 벌어진 일 때문인가요? 다 엄마 잘못인가요? 그냥 약만 처방해주시면 안 돼요?”라고 질문한다.
그러면서 궁금증을 견디지 못하고 묻는다. “이 소파는 어디에 쓰는 거죠?”
정신분석에 대한 갖가지 추측들은 「뉴요커」 지의 만평이나 우디 앨런의 영화 같은 정신분석과 관련된 경험들을 묘사한 미디어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다행히 이런 장면들은 현실과는 별로 유사한 점이 없다.
그렇다면 정신분석은 과연 무엇인가? 정신분석은 치유의 방법이면서 마음을 읽는 이론이다. 정신분석은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려는 시도다. 사람들이 왜 자신에게 가장 이로운 행동을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파멸할 수 있는 행동을 하는지 설명하는 것도 정신분석의 목표 가운데 하나다. 이를 위해 정신분석은 과거가 현재의 고통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내고, 변화에 대한 사람들의 희망과 두려움을 분석한다. 사람들이 더욱 자유롭고 원하는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 p.44-45
프로이트는 일정한 거리를 둔 주의집중에 대해 “마음에 무언가를 남기려는 시도를 하지 말고 그저 듣기만 해야 한다”(Freud, 1912e, p.111)고 요청했다. 이것이 후대의 정신분석가들에게 얼마나 엄청난 임무를 부여하는 일인지를 그가 과연 알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일정한 거리를 둔 주의집중을 위한 지침은 글로 남아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사띠
의 수행을 통해 함양되는 바로 그 집중방식이고, 따라서 알아차림 수행은 분석가의 집중을 향상할 뿐만 아니라 중립적이고, 균형과 공감을 유지하면서 환자의 자유연상을 따라갈 수 있는 능력도 높여준다. 정신분석학계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명상수행을 하면서, 명상이 정신분석 치료에 도움을 준다는 확실한 증거들이 쌓이고 있다. 마치 붓다가 “와서 직접 보라”고 우리를 부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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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점 또는 중첩되는 부분들을 살펴보기에 앞서, ‘명상가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에 대해 이야기하고 넘어가겠다. 불교 전통의 핵심인 명상수행을 오해하고 오용하는 서구인들의 사례, 특히 이 글의 취지에 맞게 심리치료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하려 한다. 이 분야의 전문가라면 대부분 익숙한 이야기일 것이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포장하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사실은 치료나 명상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더욱 평온하고 평화로워지기를 바란다는 점이다. 그런데 목표가 분명하지 않을 때, 처음부터 스승의 지도가 부적절한 경우 혼란이 생긴다. 특히 서구인들이 빠지기 쉬운 위험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나를 초월하고 ‘나라는 요새’를 무너뜨리는 길로 이끄는 건전한 영적 수행을 위해, 서구인들은 우선 흔들림 없이 강력한 개인 정체감을 확립해야 한다. 확립된 정체감이 반드시 행복한 것일 필요는 없다. 정체감이 결여되어 있다면 본격적인 명상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건강하고 안정된 자아를 회복하도록 심리치료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동양의 가르침은 누구에게나 건전한 자아 구조가 확립되어 있다고 전제하거나 건전한 자아에 대해 서구 문화와 전혀 다르게 정의한다. 하지만 서구인들에게는 이 같은 전제가 위험하다. 어느 정도 단단하고 건전한 인간관계를 형성할 능력이 계발되지 않았거나, 자신의 감정을 모르거나 또는 알아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거나, 불안에 시달린다면 명상보다 먼저 심리치료를 받아야 한다. 심리치료는 실용적인 수준에서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 p.121-122
주의집중이 실제 어떻게 일어나는지 살펴보자. 처음 마음이 내면을 향해 자신을 돌아볼 때, 주의는 한곳에 자리 잡지 못하고 원숭이처럼 날뛴다. 생각, 감각적 지각, 근심거리, 계획, 느낌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스스로에 대해 일관된 시각을 유지하고, 고통을 피하고, 익숙한 것을 놓지 않으려는 우리의 일상적인 노력이 바로 이런 것이다. 쫓으려는 노력을 그만두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더 중립적으로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한정된 자기’(bounded self)도 이렇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 가운데 하나다. 제한하는 개념들로부터 자유로울 때 평범함 안에 비범함이 드러나고, 그것의 구조 없이 비어있는 본성과 서로 관통하고 쉼 없이 변화하는 본성이 드러난다. 결국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하나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존재의 바다에 부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자체가 곧 바다다. 자기와 타자의 분별은 사라진다. 원래의 자기 앞에서 자기도 사라진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알아차림 안에 머무를 수 있을까? 내가 아는 한 어떤 정신분석가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주의 기울이기’ 또는 ‘소극적 수용능력’을 함양하는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을 논한 적이 없다. 그저 분석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그만이다. 비온조차(bion, 1991) 마지막으로 발표한 중요한 저서 『미래의 회고록』(A Memoire of the Future)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평생 나는 자유를 빼앗긴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상식, 이성, 기억, 욕망 등에 끌
려다니기만 했다. 특히 이해하고 이해받기 위해 부질없이 두려워했다”(p.578).
--- p.223-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