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에 예민한 사람도 없고 아무것에도 예민하지 않은 사람도 없다. 누구나 무의식 안에 자동화된 자기만의 습성 같은 걸 갖고 있는데, 그것이 자기만의 예민함을 만들어낸다. 그걸 찾아내고 이해하고 가슴으로 통찰하기 전에는 자신이 왜 어떤 특정한 것들에 그리 예민한지, 또는 왜 정서적으로 불안정한지 이해하지 못한다.
문제는 무엇을 모르는지 그걸 몰라서 달라지지 못하는 것이다. 벌컥 화를 내버렸지만 실은 그렇게까지 화낼 일은 아니라는 것, 알고 있다. 자신이 과하게 희생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남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것도, 책임감이나 도덕주의에 대한 강박을 조금만 내려놓으면 된다는 것도 다 안다. 다만 문제는 내려놓아야 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신경이 자꾸만 곤두서는 현상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부진 결심을 해도 여전히 내려놓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무의식에 자동화되어버린 습성들 때문이다. 그것들을 자각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내 마음을 컨트롤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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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알아가려면 어린 시절과 무의식을 탐색해야 한다. 이 책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하는 두 가지 주제는 ‘어린시절’과 ‘무의식’이다. 이 두 가지를 빼놓고서는 자존감, 자아 찾기, 홀로서기, 마음의 치유 등에 대해 논할 수가 없다.
어린 시절과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들이 당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수도, 따뜻하게 할 수도, 호기심을 채워줄 수도 있으리라 짐작한다. 오랫동안 애써 부정하거나 외면하던 것들, 즉 무의식 안에 숨겨놓은 자신에 관한 진실들, 무의식 안에 새겨진 인간 본성의 민낯들, 또는 어린 시절의 상처들을 대면하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 무언가 보이기 시작할 때 반가울 수도 있고, 울컥할 수도 있고, 어색할 수도 있고, 두려울 수도 있고, 화가 날 수도 있다. 꼭 알아야 할것들을 알아가려 할 때 조금의 불편함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부터 먼 길, 급하지 않게 차근차근 가보겠다.
--- p.21
행복한 장면을 상상으로 떠올려보기는 ‘심상작업imagery work’이라는 심리상담 기법의 일종이다. 이를 통해 자신의 무의식 안에 습성으로 자리 잡은 마음의 테마들을 찾아볼 수 있다. 책임에 짓눌려 사느라 자신의 행복 찾기를 잊은 사람, 행복한 장면을 상상하려는데 어느새 슬픔에 젖고 있는 사람, 화려한 무대를 공상하면서 뿌듯함에 젖어 들었다가도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면 이내 긴장감에 눌리는 사람 등등. 그 외에도 각양각색의 테마들이 개개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 의미 있게 각인된 테마들을 이해하면 자신의 행동 패턴, 관계 맺기의 스타일, 성격과 가치관 등에 대해서도 한층 이해가 깊어질 수 있다.
--- p.44
마틴의 경우처럼 무의식에 깊이 새겨진 부정적인 자화상을 ‘심리도식’이라고 부른다. ‘무의식’이라는 말은 스스로가 그런 자화상을 갖고 있음을 깨닫기가 매우 어렵다는 걸 의미한다. ‘새겨졌다’는 말은 지우고 싶어도 여간해서는 잘 지워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아픈 가시가 깊이 박혀 있는데 잘 보이지도 않아서 있는 줄도 모른 채로 살고 있다는 말이다. 종종 이유 없이 마음이 철렁하거나 울컥해지는데 무의식에 새겨진 상처 때문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하기에 계속 혼란스러워할 뿐이다. 보이지 않는 마음을 보지 못한 채 삶은 삐걱삐걱 굴러간다.
--- p.81
자라 보고 놀랐던 가슴은 솥뚜껑 보고도 놀라는 법이다. 남들에게는 중립적인 상황, 즉 ‘솥뚜껑’이 내게는 도식을 흔들어 깨우는 독한 자극이 될 수 있다.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데 나만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내게는 너무 자극적인 상황들’을 도식촉발자극Schema Trigger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을 만나면 감정의 쓰나미가 몰려온다. 잠자던 도식을 흔들어 깨우는 순간이다. 치솟는 불길을 빨리 진화하지 않으면 큰일이다. 자아가 붕괴할 것만 같은, 세상이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은 급박한 위기 상황이라고 느낀다.
이 정도 위기 상황에서는 당연히 도식대처방식을 재빨리 꺼내 들어야 한다. 도식을 잠재우는 데는 이만한 게 없다고 평생 믿고 살아온, 자신의 무의식 안에 습관처럼 자동화되어 있는 방어기제를 서둘러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대처방식들은 일시적으로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더 좋지 않은 결과를 낳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도식을 제압하거나 지워서 없애려고 대처방식을 사용하는데, 시간이 갈수록 도식이 점점 더 강해지기만 한다는 사실이다. 결국 악순환이 된다는 말이다.
--- p.103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주인공 ‘성덕선’을 보라. 언니는 보라, 동생은 노을인데 왜 자기만 이름이 덕선이냐고 짜증을 부린다. 언니만 계란 프라이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자기도 먹을 줄 안다고 눈물 콧물 다 짜내면서 울부짖곤 한다. 엄마의 답은 간단하다. 언니가 편식이 심한데 그나마 그거라도 줘야 밥을 먹으니까, 덕선이는 착해서 양보 잘하니까. 왜 이름이 덕선인지는 잘 대답을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덕선은 부모에 대한 믿음과 애정이 각별하고 친구들에 대한 의리도 남다른 아이다. 그런 아이가 저렇게 울부짖을 때 부모도, 친구들도, 시청자들도 모두 마음이 따뜻해졌다. 입가에 배시시 웃음까지 번지면서. 원망이라는 건 원래 이런 식이어야 한다. 이런 식의 원망이 자신의 자아에 없다면 일단 의심해보자. 혹시 내가 애정 결핍은 아닌지. 어른스러움에만 치중하느라 내면의 어린아이가 숨도 못 쉬고 있는 건 아닌지.
애정 결핍이 있었음에도 자신은 유복하게 잘 자라서 부모에게는 그저 감사함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기만큼 사랑과 인정을 받고 자란 아이들이 많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여간해서는 서운함을 드러내지 않고 감정을 삭히는 데 익숙하며 책임감과 희생정신이 강하다면, 소위 말하는 ‘착한 사람 증후군’처럼 보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사람은 어쩌면 너무 일찍 철들고 아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워서 양보와 배려가 많고 책임감이 강했을 수 있다. 그래서 늘 칭찬과 신뢰를 받으면서 성장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런 아이가 부모의 인정과 신뢰를 많이 받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관심과 보살핌에 대한 욕구 표현이 부족하면 결과적으로 주는 것에 비해 받는 게 현저히 부족해진다. 그래서 애정 결핍이 아프기에 애정 나눠주기로 대리만족을 하는 성격이 될 수밖에 없다. 아파도 말하지 못하는 마음이 가장 슬픈 거다.
--- p.207~208
“수영하러 갈 사람 손 들어봐”라는 말은 날도 더운데 시원하게 물장구치고 놀자는 것일 뿐, 어린 시절 선생님의 “생활보호대상자 손 들어봐”라는 말과 전혀 무관하다는 걸 인지해야 한다. 술을 못 마셔도 술자리에서, 수영을 못해도 수영장이나 해변에서, 그날 마침 돈이 궁해도 백화점에서 얼마든지 유쾌하게 섞여서 놀 수 있다. 그런 놀이에 익숙해지기 위한 새로운 체험이 필요하다. 도식을 촉발하는 자극을 만난 순간, 지금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아주 불편하고 해로운 감정들에 휘감겼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야, 새로운 방식의 대처 행동과 새로운 느낌의 체험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 p.223
몸을 물에 담그지 않고 한평생 살아가도 문제될 건 없다. 하지만 좀 더 다양한 여가 생활, 좀 더 원활한 사회생활, 좀 더 나은 삶의 질을 원한다면 한번쯤 물 공포를 이겨내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나중에 자신의 아이들에게 부모와 함께 물놀이하는 즐거움을 선사하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 적어도 친척들, 친구들 다 모인 자리에서 혼자만 소외되는 느낌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으니까. 만약 달라지기를 원한다면 물에 몸을 담가야 한다.
막상 물에 들어가면 당연히 몸에서 진동이 올 것이다. 온갖 기억들, 감정들, 몸의 증상들이 쓰나미처럼 덮쳐올 것이다. 그럴 줄 알고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창의적 무기력’이다. 긴장을 누그러뜨리고 몸을 진정시킨 상태에서 물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마법 같은 건 없다. 그러나 사람의 몸에는 불변하는 법칙이 있다. 일차적인 모든 감정들은 온전하게 받아들이면 시간이 지나면서 반드시 누그러진다는 것이다. 아무리 몸이 떨린다 한들 열 시간 내내 떨기야 하겠는가. 좀 지나면 서서히 가라앉아야 정상 아닌가. 물 공포를 치유하는 데 실제로 하루 이상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물속에서 느끼는 특유의 묘하게 시원하고 쾌적한 느낌을 처음으로 느껴보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사람의 몸을 갖고 있다면 어김없다.
--- p.232~233
삶의 어느 길목에서 현실적인 안정을 추구하는 순간 마음의 이야기는 문을 닫아버리고 성장이 중단된다. 자아를 찾아가는 성장의 길이 고난으로 여겨지고 두려움이 앞설 때 현실에 안주해버리면 자아의 비밀은 영원히 열리지 않는다. 연금술사가 금을 빚기 위해서는 납을 녹여서 이전의 형체를 파괴해야만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산티아고는 현실에 안주하고 싶어질 때마다 여행길에서 만난 어느 노인, 살렘의 왕의 가르침을 떠올리고 용기를 추스르곤 했다. 그 왕의 가르침은 절대로 꿈을 포기하지 말고 표지를 따라가라는 것이었다.
--- p.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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