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는 언제부턴가 내 마음의 꽃이 되었다. 데이지는 단순한 모양새를 한 꽃이다. 작고 앙증맞은 꽃은 본체와 이파리가 각각으로 선명하다. 꽃받침도 꽃 밑에 숨어 있고, 꽃과 꽃대의 경계가 뚜렷하다. 한마디로 ‘들고 남’의 경계가 확실한 꽃이다. 잎은 잎이요, 꽃은 꽃인 채로 제 소박함을 드러내는 꽃이 데이지다.
---「데이지의 노래」중에서
엄마집 마루 창가에는 재봉틀이 놓여 있다. 익숙하게 순서대로 실을 꿴 엄마는 손으로 바퀴를 돌리는 동시에 발로는 장방형의 페달을 밟는다. 마법 같은 엄마의 솜씨에 금세 자투리 천은 화사한 베갯잇으로 재탄생된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발판 위의 엄마 발과 바퀴를 돌리는 엄마 손 그리고 꽃무늬 천을 내려다보는 늙은 엄마의 순한 눈빛.
---「엄마의 재봉틀」중에서
“한 밥에 오르고 한 밥에 내린다.”는 어른들 말씀에 기대, 잘 먹여야 한다는 과장된 모성이 도리어 소화불량을 부르고야 말았다. 산해진미보다 소박한 겉절이가, 바깥 더운밥보다 내 집 식은 밥이 낫다는 단순한 원리를 왜 몰랐을까. 집 자체가 최고의 밥이고 엄마 자체가 최선의 반찬이라는 걸 왜 깨치지 못했을까.
---「집밥」중에서
사랑하지 않아야 사랑이 온다. 사랑하면 그 사랑은 달아나기 십상이다.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첫사랑은 실패로 남는다. 사랑을 이론서 안에서만 이해한 치들은 ‘사랑은 주는 것’이라며 순정한 사람들을 기만해왔다. 더 많이 사랑할수록 충만해진다는 것은 거짓이다. 사랑은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다만 혼란이다.
---「사랑하지 않아야 사랑이」중에서
의혹으로 흔들리는 누군가의 눈빛 앞에서, 맞닿을 수 없는 협곡 같은 절망이 처음으로 그대 입술을 적신다면 이제 돌아오지 않을 여행을 할 때다. 돌이킬 수 없는 그 눈빛 앞에서 돌아오지 않을 것들이야말로 찬란한 눈부심이라고 스스로를 축복할 일이다. 돌아오지 않아야 할 모든 ‘첫’에 대해 위로 받고 싶은 새벽의 불면.
---「돌아오지 않을 것들」중에서
평범한 우리말 단어 하나도 제대로 부리지 못하는 건 내 안의 정서가 외국어 낱말처럼 서툴기 때문은 아닐지. 두껍게 언 마음 호수에다 도끼로 바람구멍 한 점 내고 싶다. 그리하여 장갑 낀 쉼보르스카 여사처럼 내 안의 바다표범과 고드름을 맘껏 불러내고 싶다. 은밀한 결구로 화룡점정 하나 찍지 못하는 불면의 밤이 또 가고 있다.
---「장갑 낀 시인」중에서
누군가 이 책이 재미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하겠고, 누군가 이 책이 좋은 책이냐고 묻는다면 ‘글세’라고 얼버무릴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이 책에 밑줄을 듯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할 것이고, 누군가 이 책을 소장하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물론’이라고 웃어주겠다. 앞서가는 문장들의 너울에 독자는 속수무책으로 헤맬 수밖에 없다. 망망대해에서 구해줄 조각배 한 척 없이 허우적거리는데도 맛보는 쾌감이랄까.
---「숨그네를 탔어」중에서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 흔히 만나는 두 나무가 사이프러스와 우산소나무이다. 전자는 밑이 넓다가 뒤로 솟구칠수록 뾰족한 긴 삼각형 모양이고, 후자는 나무둥치가 뻗어가다 윗부분 잎맥에 이를수록 핵 분열하는 것처럼 둥글게 퍼지는 형태이다. 각각은 직선과 곡선, 첨탑과 돔, 자제와 허용 등의 이미지를 풍긴다. 한데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 두 나무가 연출하는 거리의 풍광이야말로 멋진 조화를 이룬다.
---「타자를 안다는 것」중에서
‘시청視聽’은 흘깃 보고 듣는 것을 말하고, ‘견문見聞’은 제대로 보고 듣는 것을 말한다. 시청과 견문은 그 깊이와 넓이가 다르다. 그런데도 아무 것도 보고 들은 것이 없으면서도 ‘시청’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아니면 겨우 ‘시청’했으면서 ‘견문’했다고 착각한다. 안 본 사람이 흘려 본 사람을 이기고, 흘려 본 사람은 제대로 본 사람을 앞선다. 그런 부조리한 상황이 곳곳에서 연출된다.
---「시청과 견문」중에서
책 속에 길이 있다는 건, 반만 맞는 말이다. 때론 책을 버리고 풍경 속에 흠뻑 적어야 길이 보인다. 푸성귀 뜯고 씻던 시린 손, 쉴 자리 마련하려 굽히던 연한 무릎, 바람막이로 서서 따뜻한 물 끓여내던 환한 미소, 이 모든 것들이 자연과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책 속에만 글이 있는 게 아니라 그렇게 풍경 속에도 글이 있었다.
---「풍경이 가르친다」중에서
좋은 수필의 전형이라고 하는 글들을 보면 대개 면죄부 얻은 과거의 상투적 회고일 때가 많다. 툇마루에서 벌어지는 추억식 회고담은 당연한 선택이다. 거기서 묘사되는 모성의 희생은 위엄 깃든 찬사가 되고, 부성의 패악은 낭만적 양념으로 포장된다. 사람들은 으레 수필은 이래야만 하는 것이구나, 하면서 흥미를 잃게 된다. 김수영식 대로라면 ‘회고 미학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 된다.
---「회고 미학을 경계함」중에서
좋은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눈길은 헤플수록 무죄였다. 한 잔의 차로 부른 배를 달랠 즈음에야 마당 앞의 길고 팽팽하게 당겨진 빨랫줄이 눈에 들어왔다. 쪽물 들인 천을 말리는 주인장의 심지 굳은 표정처럼 서이쓴 바지랑대와 툭툭 잘린 유년의 기억처럼 매달려 있는 빨래집게 뒤로 이른 별이 뜨고 있었다. 아쉬울 때 자리 뜨기 좋은 최적의 시간만 남았다.
---「먹은 밥은 시가 되고」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