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성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는 분명한 증거다. 자존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존성과 그리스도의 자존성(자신 안에 생명을 지니고 계심)에 대한 진리는 우리 믿음의 근간이다. 창조된 모든 것은 ‘되어가는 것’이다. 창조된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 존재나 생명은 되어가는 모든 것과 구별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존재하시는 분’은 영원하며, ‘되어가는’ 모든 것을 위한 생명의 근원이다. 피조물과 창조주, 즉 우리와 하나님을 구별하는 것이 바로 그 점이다. …
온 우주는 ‘되어감’의 범주 속에 있다.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셨던 시점은 없다.
모든 피조물은 자신의 생명을 외부, 즉 하나님으로부터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을 자신 안에서 얻으신다.
--- 1. 신적 말씀의 영원한 영광 중에서
예수님은 신적 왕의 흔들림 없는 확신으로 진리를 말씀하셨고, 사람들은 다만 놀랄 뿐이었다(참조, 마 7:28-29). 정곡을 찌르는 예수님의 심오한 말씀은, 랍비들의 온갖 견해를 인용하기 좋아했던 서기관들의 거들먹거리는 말과 뚜렷이 대조되었다. 종종 서기관들은 신비적이며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가르쳤고, 흔히 사소한 세목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 달랐다.
예수님은 자신의 신학을 다른 사람의 숙고 사항에서 추론하지 않았고, 여러 가지 가능한 설명을 제시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독단적이지 않고 절대적이었다. 그것은 모호하거나 은밀하지 않고, 논리적이며 구체적이었다.
예수님의 논거는 합리적이고 불가피했으며, 본질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 2. 사탄과 귀신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중에서
예수님은 다른 어떤 사람과도 다르게 가르치셨고, 다른 어떤 사람도 본 적 없는 능력을 지니고 사용하셨다.
예수님의 능력 이면에는 예수님의 권위가 있었다. 귀신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두려워했다. 무리는 예수님의 능력을 목격하고서 놀랐다. 귀신들은 예수님을 믿었지만 구원받을 수 없었다. 무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아 구원받지 못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반응이 필수적이다. 죄인들은 ‘두려워하며’ ‘놀랄’ 필요가 있다. 무서운 심판에 대해 두려워하고, 구주로 인해 놀란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놀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수님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놀람으로 만족하지 않으신다. 죄인들이 심판주이신 예수님을 두려워하고, 구주이신 예수님께로 나아오길 원하신다.
--- 3. 사탄과 귀신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중에서
아직 들것에 누워 있는 사람을 긍휼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예수님은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막 2:11)고 씀하셨다. 이 이적은 죄와 그 영향을 제압할 능력이 예수님께 있는지의 여부를 입증해 줄 것이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이 스스로 주장했듯 신적 권위를 지니셨는지의 여부를 드러낼 것이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자로 비난했다. 그러나 신성모독자들은 사람의 마음을 읽지 못한다. 죄를 사하지 못한다. 또 중풍병자를 치유하여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지도 못한다. 이 이적을 행함으로써 예수님은 신성모독자가 아님을 입증하셨다. 만일 예수님이 신성모독자가 아니라면, 예수님은 자신의 주장대로 하나님이었다.
--- 4. 죄와 질병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중에서
안식일 준수 명령은 다른 아홉 가지 계명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을 진작시키기 위한 것이었다(참조, 출 20:1-17; 막 12:28-31). 하나님을 경외하며 휴식을 통해 원기를 회복하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날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갑갑한 규례와 제재의 날로 변질시켰다. 예수님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사두개인들을 질책하셨듯(마 21:13), 예배하는 날을
부질없는 규례 준수의 짐을 지는 날로 변질시킨 바리새인들을 질타하셨다. 사람이 만든 안식일 관련 전승들을 공공연히 무시함으로써,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가장 민감한 부분에서 그들과 직접 충돌하셨다.
--- 5. 안식일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중에서
베드로가 제자들 중 리더가 된 것은 다른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향한 큰 사랑 때문이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웠던 것 같다.
열두 명의 목록에서 늘 제일 앞에 나온다. 약한 믿음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여 토대로 삼으시는 주님은 연약하고 불완전한 사랑도 결코 거부하지 않으신다. 크신 인내와 배려로 자녀들의 사랑을 받으시며, 성공과 승리를 통해서는 물론이고 시련과 역경을 통해서도 그 사랑을 자신의 사랑에 부합하도록 자라게 하신다. …
젖게 하는 것이 물의 속성이고 밝고 뜨거운 것이 태양의 속성이듯,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무한하고, 공평하고, 무조건적이며, 불변하고, 끝없고, 완전한 사랑으로 사랑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할 때(특히 서로 사랑할 때)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가장 완벽하게 반영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 6. 피조물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중에서
예수님 시대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신성과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서 높이 평가하기만을 원해 왔다.
빌라도는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라고 말했다(눅 23:4). 나폴레옹은 이르기를 “나는 사람들을 안다.
예수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했다. 디드로는 예수님을 ‘특출한 분’으로, 독일 합리주의자 슈트라우스는 ‘종교의 최고 모델’로, 존 스튜어트 밀은 ‘인류의 가이드’로, 프랑스 무신론자 르낭은 ‘사람의 아들들 중 가장 위대한 분’으로,
데오도르 파커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함께 계신 젊은이’로, 그리고 로버트 오언스는 ‘흠잡을 데 없는 분’으로 지칭했다.
우리 시대의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궁극적 슈퍼스타라 불렀다. 그러나 이 모든 칭호와 묘사는 인간의 몸을 입은 하나님, 곧 메시아인 예수님을 지칭하기에 미흡하다.
--- 7. 인자와 하나님의 아들 중에서
그리스도인이기 위해서는 예수님에 대한 성경 계시를, 그분이 삼위일체의 영원한 제2위이심을, 성육신한 하나님으로서 시공간 속으로 들어오셨음을,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음을, 무죄한 삶을 사셨음을, 그분의 십자가 죽음이 그분을 믿는 모든 이의 죄를 대속하기에 충분한 유일한 대속의 희생임을, 그분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올라가셨음을, 지금 구속함받은 사람들을 위해 중재하고 계심을, 그리고 언젠가는 영광중에 다시 오실 것임을 온전히 믿어야 한다.
--- 10. ‘나는 … 이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