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구멍 난 치즈처럼 변해간다. 도시마다 싱크홀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자동차가, 빌딩이, 길을 걷던 사람이, 잠자던 사람들의 침대가 갑자기 땅 밑으로 빠져든다. 누군가에 의해 저질러진 악행은 그냥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저 하늘의 어디선가 폭발한 별들의 잔해가 사라지지 않고 우리에게 남겨졌듯이. 하물며 우리 이웃의 심장이 타버려 생겨난 덩어리들이 그리 쉽게 사라질 리가 있을까?
---「사과파이 나누는 시간」중에서
미래는 사과파이 한 조각을 찻숟가락 위에 올려놓은 다음 가만히 흔들어본다.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에너지를 지구 반대편으로 쏘아 보낸다. 자, 받아!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에너지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지면을 뚫고 나갈 때, 우주야, 너도 놀라겠지?
---「사과파이 나누는 시간」중에서
“네 영혼을 고향집에 두고 몸만 빠져나왔다고 생각해. 아니, 너 자신을 복제품이라고 생각해봐. 그러면 모든 게 간단해져.”
희는 눈을 감았다. 여권을 복사하듯이 자신을 기계 속에 넣고 복사했다. 한 장의 나, 두 장의 나, 세 장의 나……. 과연 효과가 있었던 걸까? (……) 하얀 양들이 하나씩 울타리를 넘는 것처럼 자신의 모습이 담긴 하얀 종이가 기계 밖으로 마구 튀어나왔다.
---「미로」중에서
“나는 어둠 속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멀리 우주 공간에 떠 있는 하얗고 둥근 달이 나를 내려다볼 때까지. 달빛 아래 서 있던 한없이 작아진 사내…… 그가 지금의 나보다 더 힘들고 절망적이었을까. (……)
‘그래도 난 아직 존재하고 있어. 비록 작아져 있을지라도, 난 아직 존재하고 있어. 비록 작아져 있을지라도, 난 아직 존재…….’
모기만큼 작은 생명체들이 내는 소리가 메아리 되어 돌아왔다.
---「모기」중에서
“금성은 원래 형제별이라고 불릴 정도로 지구와 밀도와 크기, 환경이 유사했대. 하지만 뜨거운 불기운에 휩싸인 지옥과도 같은 곳이 되었지. 왜인 줄 알아? 자기장을 잃어갔기 때문이야. 심한 태풍이 자주 불던 금성은 자전 속도가 느렸고, 그래서 자기장이 약해지자 차츰 금성을 둘러싸고 있던 대기권이 우주 속으로 흩어져버렸어.” (……) 설명 끝에 캐서린이 강조했다. “금성은 자기장을 잃어버린 존재를 상징해. 두번째니 세번째니 해가면서 자기를 잃어버리면 결국 수진만 황폐해질 따름이야.”
---「특별한 만찬」중에서
여자는 제 목을 감은 혀를 가위로 동강동강 잘라낸다. 잘린 혀들이 바닥에서 개구리처럼 폴짝폴짝 뛴다. 여자는 아기를 내동댕이치고 어디론가 도망친다. 동강 난 혀들만이 날뛴다. (……) 그는 미친 듯이 달려드는 새빨간 혀들을 뿌리치느라 두 손을 휘젓는다. (……) 못다 한 말들의 조각……. 꿈속에서 발광하던 혀 조각들이 떠올라 그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잊고 있던 허기가 밀려왔다.
---「얼음사과」중에서
하지만 우주 여행자 보이저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지금도 우리에게 전해지듯이, 멀리 떠나간 사람들도 마음속에 남아 있다. 두고두고 생의 의미를 새롭게 하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것이 고통스럽든지 혹은 아름답든지 간에. 오래전, 참 세상에 대한 꿈과 희망을 말하던 그 사람은 지금쯤 별이 되어 있을까. 저 우주 멀리까지 올라가 내려다보고 있을까. 목성과 토성을 지나 우주 성간을 떠도는 보이저호처럼?
---「무지갯빛 소리」중에서
해피니스 오피스텔에서 지내는 동안 그들은 그다지 해피하지 못했다. 거기에는 아흔아홉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결정적인 한 가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꿈이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미래를 제시할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살아간다는 것은 나이가 들어가는 만큼 조금씩 희망을 잃어가는 것이었다. (……) 그 순간 그는 사과처럼 생긴 자신의 심장으로 아주 작은 벌레 한 마리가 기어들어오는 이물감을 느꼈다.
---「그 섬에 들다」중에서
이곳의 말은 훈련을 제외하고는 종일 마방에 갇혀 홀로 지낸다. 서로 어울리지도, 제대로 걷지도, 심지어 사랑도 나누지 못하면서 세 평짜리 방에서 혼자 지낸다는 건 몹시 힘든 일이다. 대초원을 내달리던 활기찬 피의 본능이 몸속에서 바늘처럼 돋아나 마구 찔러댈지 모른다. 그래서 그 지루함과 답답함, 알 수 없는 불안을 견디기 위해 악벽을 하나씩 가지게 되었는지도. 한때 나나 내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더 러브렛」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