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스케는 하카타에서 도쿄까지 올 수 있는 승차권을 손에 쥐고서 보스턴백을 안고 전철을 탔다. 도쿄역에서 거의 반 정도의 승객이 내렸기 때문에 차 안은 한산했다. 신스케는 전철 칸의 연결부에 가까운 좌석에 앉아서 건너편 창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무심코 관찰하기 시작했다.---p.10
신스케는 자신이 너무나 부족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처럼 느껴졌다. 그런 신스케의 기분을 눈치챘는지 오가타는 담뱃대를 문 채 말을 했다.
“책이라는 것은 장식해놓으라고 있는 거야. 어차피 지식만 앞세워봤자 제대로 된 연극은 나올 수가 없어. 스타시스템이다 뭐다 말해봤자 발성의 기초조차 충분하게 갖추지 못한 놈들에게는 돼지 목에 진주야. 우선 인간으로서 일을 하고, 연애를 하고, 투쟁을 하고, 괴로워하고, 고민을 해야 비로소 제대로 한 몫을 할 수 있는 배우가 되는 거지.”---p.34
“서민들 사는 동네의 작은 제본소 따위는 자본주의 사회의 버러지 같은 존재에 불과해. 대기업의 하청을 받는 제도 속에서 잠깐만 방심을 해도 금세 다른 동료가 그 틈을 파고들지. 아르바이트 학생을 동정하다가는 자기가 힘들어질 수밖에 없어. 그렇게 먹고 먹히는 세계에서 인정이 통용될 리가 만무하지.”---p.76
“하지만 아르바이트는 밥을 먹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인간은 우선 살아야만 합니다. 그쪽이 학생생활보다 우선하는 문제인 겁니다. 수업을 빼먹어서 뒤쳐진 부분은 나중에 열심히 해서 보충하겠습니다. 생계가 먼저고 그 다음이 수업입니다. 출석일수가 모자라서 학점을 따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아르바이트 때문에 수업을 빠졌다고 해서 비굴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뭐, 됐어.”
강사는 출석부를 좌우로 흔들어 신스케의 말을 가로막았다. ---p.139
신스케는 이 2주일 동안 있었던 이시이 강사의 훈련을 곰곰이 되새겨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탁구공에서 고무공으로, 그리고 연식야구공을 사용한 기괴한 연습도 계속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평소 걸을 때나 서 있을 때는 발꿈치를 사용하지 말고 발끝만으로 체중을 지탱하라는 명령을 받았기에 죽도록 괴롭지만 그 명령을 실행하고 있다. 그것은 다리의 탄력성을 키우는 트레이닝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습을 할 때뿐만이 아니라 하루 온종일 그런 식으로 발끝으로 서서 돌아다니는 것은 정말이지 고통스럽다. 마라톤도 계속되고 있다. 달리는 것, 발끝으로 서는 것, 눈을 감지 않고 공을 보는 것, 이 세 가지를 이시이 강사는 당면한 의무처럼 신스케에게 과제로 부여했다.---p.378
하마자키는 시험해보듯 가볍게 점프를 하고 신스케의 볼에 글러브를 댔다.
“이시이 선생님은 최근에 어떻게 지내시고 있어? 별로 기운이 없어 보이던데.”
“대학에 사표를 낸 것으로 알고 있어.”
“들었어. 묘한 스캔들에 휘말린 것 같더라고.”---p.471
이시이 강사는 양손을 벌리고 상체를 좌우로 흔들면서 호우 속에서 이상한 원시인 부족의 댄스 같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야, 너도 같이 추자.”
“그럴까요?”
마음속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뜨거운 덩어리가 몸의 안쪽에서 그를 충동질하는 것 같았다. 신스케도 이시이 강사의 몸짓에 맞춰서 빗속에서 양손을 벌리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둘이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자신이 하는 짓이 바보 같기도 했지만 그런 바보 같은 짓에는 일종의 상쾌함 비슷한 것이 있다.
“바보야!”
이시이 강사가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바보야!”
신스케도 똑같이 외쳤다. 그것은 자신을 향해서 외치는 것이기도 하고 인간 전체, 세계 전체를 향해 외치는 것 같기도 했다. 정원의 해바라기를 짓밟고 빗물에 미끄러지면서 두 사람은 빗속에서 계속 춤을 추었다. 그러자 신스케의 몸속에서 왠지 힘이 세고 커다란 무언가가 자신과 세계를 연결해주는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쳤다.
“아버지, 나는 도쿄에 왔어요!”---p.249
그 여자가 고개를 돌려 신스케를 쳐다봤다. 피부색이 하얗고 얼굴이 긴,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입술만은 선명할 정도로 빨갰다. 시원스럽게 찢어진 쌍꺼풀 없는 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감돌고 있었다. 정원의 신록의 반사를 받아서인지 하얀 얼굴이 창백하게까지 보였다.---p.67
“신스케 오빠, 나랑 만나서 반가운 거지?”
오리에는 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손수건을 꺼내서 코를 풀었다. 옆으로 돌린 얼굴에 화장이 번져서 얼룩진 것을 신스케는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버스타고 신주쿠로 가자.”
“응.”
두 사람은 플라타너스 가로수 아래에서 나란히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걷고 있다. 오리에의 어깨가 예전과 변함없이 걸을 때마다 흔들린다. 신스케는 삿리에의 그런 모습을 그리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가슴에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오리에는 지금도 가볍게 한쪽 다리를 저는 것 같았다.---p.220
신스케는 아직까지도 모든 여자들이 남자와 그런 식으로 몸을 섞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현실적으로 이해를 할 수가 없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밤마다 레이코나 에이코, 그리고 가오루, 오리에, 그리고 가끔은 도쿄에 올라온 후로 여태껏 만나지 못한 아즈사 선생이나 이시이 강사의 애인인 리코 등 여자들의 군상이 뒤엉키듯이 등장하여 그의 욕망을 자극했다.
‘나는 어쩌면 변태적일 정도로 성적 관심이 강한 인간이 아닐까?’
신스케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격렬한 불안에 휩싸일 때가 있었다.
자기 이외의 청년들 역시 이런 식으로 삶 속의 커다란 부분을 학생운동, 프롤레타리아운동이나 문학이나 연극, 아니면 스포츠나, 학문, 그런 것에 열중하며 열정을 불태우는 학생들이 많은데 아직 자신은 무엇 하나 구체적으로 행동하고 있지 않다. ---p.244
도쿄에 올라온 다음부터 신스케는 규슈에서는 알지 못했던 지적인 여자의 매력에 눈을 뜨게 되었다. 머리가 좋고 감수성이 풍부하며, 기지에 찬 대응을 할 줄 알고 넓은 시야를 가진 젊은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성적인 호기심과 별도로 그 자체가 하나의 쾌락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신스케가 지쿠호에서 친하게 지냈던 여자들인 엄마 다에나 오리에, 그리고 하나와 조직의 젊은 형들이 데리고 다니는 여자들한테서는 느낄 수 없었던 점이다. 그나마 학교를 뛰쳐나갔던 용감한 여교사, 아즈사 선생에게 그런 분위기가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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