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의 가문은 예성강·임진강과 강화도를 연결하는 해상 세력이었다. 896년에 왕건의 아버지 용건이 궁예 휘하에 들어가며 용건은 철원태수로, 왕건은 금성태수金城太守로 임명되었다. 용건과 함께 궁예 밑으로 들어간 이후, 왕건은 자신의 능력으로 전공戰功을 세우면서, 913년에는 파진찬波珍. 벼슬을 받고 시중侍中에까지 올랐다.
궁예가 미륵관심법을 핑계로 많은 인물을 제거하는 동안, 왕건 역시 역모 혐의를 받아 위기에 처했으나 제거되지는 않았다. 결국 918년 6월, 왕건 수하의 장수들인 신숭겸申崇謙,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 배현경裵玄慶 등이 정변을 일으켜 궁예를 쫓아내고 왕건을 추대했다.
궁예는 천한 사람의 복장을 하고 도망쳐 산골짜기에 숨어 있다가 부양斧壤(지금의 평강)에서 백성들에게 피살되었다고 한다. 궁예의 개혁은 중앙집권체제 건설의 모범이 되었으나 호족들의 반발로 무산되고 말았다. 호족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한계를 보여줬던 것이다.
918년 왕위에 오른 왕건은 나라 이름을 고려高麗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했다. 919년 1월에는 도읍을 다시 송악으로 옮겼다. 궁예와 달리 신라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왕건은 고려를 세우면서 견훤과도 화친을 시도했다. 견훤도 인질을 교환하며 화해를 맺기도 했지만, 견훤이 보낸 인질이 병으로 죽으면서 화친이 깨졌다. ---p.52,《1장 율령체제의 붕괴와 수습》
칭기즈칸은 또다시 해외 정벌에 나섰다. 우선 칭기즈칸의 서방 정벌에 참여를 거부했던 서하가 목표였다. 이때 서하는 몽골·금과의 관계에서 시달리던 이준욱이 아들 이덕왕李德旺에게 선위하고 물러난 상태였다. 그 이덕왕이 서하의 헌종獻宗이다. 그는 금과 화친 관계를 맺어 몽골의 정벌에 협력하지 않았다. 칭기즈칸은 1227년 감행된 서하 원정 중 진중에서 병으로 죽었으나, 서하는 멸망하며 몽골군에 의해 대규모 학살을 당했다.
칭기즈칸이 죽은 후 몽골제국의 판도는 서쪽으로 카스피해, 동쪽으로 동중국해, 남쪽으로는 파미르·티베트고원에 이르렀다. 이렇게 광대한 영역의 이질적인 종족과 문화가 몽골제국을 이루는 요소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몽골제국의 보호하에 중국, 페르시아, 인도, 중앙아시아, 흑해 주변에서 러시아까지를 포함한 동양과 서양이 통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교역이 이루어졌다.
몽골의 지배자들은 ‘초원의 길’이라 전해지는 동서의 교통로에 역과 말, 그리고 숙소를 마련했다. 그 덕분에 외국 사절과 여행자들은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몽골제국에서는 파이자라는 여권이 발행되어 여행 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 폴로가 멀리 중국을 여행하다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 영향이 크다. 파이자는 현재의 러시아 영토에서 여러 장 발견된 바 있다. ---p.187,《3장 몽골제국의 등장과 동아시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여러 정책을 통해 일본 열도를 안정시켰다. 그렇지만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일본 열도를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중국 대륙에 대한 야심을 내비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이묘의 힘을 약화시키고 해외무역을 장악하려 했다는 등 여러 가지가 지목된다.
그렇지만 하나하나의 이유들을 따로 떼어보면 납득이 갈 것 같지는 않다. 그가 정치적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다이묘를 견제할 전쟁을 일으켰다고 보는 시각부터가 그렇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른 다이묘와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의 세력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다이묘의 영지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었고 대부분의 다이묘가 꺼리는 원정을 강행할 수 있었다는 점 자체가 그의 권력 기반이 쉽게 흔들릴 상황이 아님을 보여준다.
또 경쟁이 될 만한 다이묘를 견제하려 했다면, 가장 위협이 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빼놓은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조선 침공에 앞세운 다이묘는 고니시 유키나가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등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래에서 성장한 다이묘들이다. 평화적인 방법을 통해서 할 수도 있는 해외무역을 굳이 전쟁으로 해결하려 했다는 점, 공명심이나 영웅 심리, 아들 쓰루마쓰의 죽음 등도 납득할 만한 이유가 되기 어렵다.
그러고 보면 진짜 이유는 좀 복합적이라 해야 할 것 같다. 그 문제는 일본에서 무사가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한 이후의 구조적 문제였다. 이 체제에서 쇼군과 무사집단의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것이 주군에 대한 봉사를 은상恩賞으로 보상해주는 시스템이었다. 일본 열도가 내란으로 혼란스럽던 시대에는 이런 체제가 쓸모가 있지만, 내란이 해소되어버리면 그 문제점이 드러난다. 은상으로 나누어줄 영지를 확보할 수 있는 길이 막혀버리기 때문이다.---p.426~427,《5장 동아시아, 전란에 휩싸이다》
영조가 추구한 탕평은 시간이 흐르면서 노론이 정국 주도권을 가지면서 기본 취지가 퇴색되었다. 그러면서 외척 중심의 탕평파에 의지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 배경에는 18세기 이후, 지방 세력의 중앙 정계 진출이 사실상 봉쇄된 상황이 있었다. 그러면서 형성된 서울의 벌열京華閥閱들은 탕평 정책 아래에서 왕권 보호를 자처했다. 이는 왕실이 이들의 보호를 받는 꼴이었고, 나중에는 실권까지 빼앗기는 원인이 되었다.
그 조짐은 영조의 후계자였던 사도세자思棹世子의 죽음에서 나타났다. 그 빌미는 영조가 1749년 정월, 15세 된 세자에게 일부 업무를 제외한 정무 일체를 맡긴 데에서 생겼다. 영조는 탕평을 통해 사회적·정치적 문제 해결을 시도했지만 노론 세력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노론 세력 역시 영조가 그들을 멀리하려 할 때 경종의 죽음을 들먹이며 영조를 궁지로 몰았다. 세자는 이런 상황을 보며 어릴 때부터 노론 세력을 눌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영조도 세자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세자는 23세를 전후해 사람을 죽이고, 내수사의 재물을 낭비하며, 의복을 두려워하는 등 이상행동을 보였다. 이는 세자를 경계하던 노론에게 좋은 빌미가 되었다. 노론은 자신들과 성향이 다른 세자를 끌어내리기 위해 애썼다. 그래서 세자의 기이한 행실을 알고도,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하기 위해 영조에게 알리지 않았다. 이에 비해 영조와 노론으로부터 배척당하는 세자를 보호할 세력은 약했다. 영조가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한 것도, 세자의 정치적 능력을 기르기보다 실수를 빌미로 제거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p.472,《6장 전란 복구에서 근대의 입구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