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기독론은 일그러져 있다. 거의 배타적으로 복음서 이야기의 가장자리에 천막을 쳤다. 요한의 위대한 머리말을 비롯해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몇 되지 않는 서사들은 성육신의 본질에 대한 논의의 중심이 되어 왔다. 십자가 이야기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바울의 논의에 준할 만큼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속죄 신학의 발전에 주요한 역할을 해 왔다. 하지만 예수님의 출생과 죽음 사이의 기간, 그분의 생애와 사역과 기적들은 기독론의 발전에 아주 적은 역할만을 수행해 왔다. 어떤 개신교도들이 복음서를 회피하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대한 관심이 오싹할 정도로 예수님에게 결핍되어 있다는 실망감과 그분의 이해하기 힘들고 분명 아이러니한 순종에 대한 주장이 낳은 결과다. 그러나 기독론을 토의할 때 복음서를 최소한으로 사용하는 일은 종교개혁보다 한참 앞서 시작되었다. 깊은 관심과 논쟁과 해석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기술적 용어와 특이성에도 불구하고, 기독론은 2천 년의 교회 역사 동안 유아기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 서론 중에서
포로 귀환과 예수님의 오심 사이의 기간은 구약과 신약 둘 모두의 연구에서 종종 무시된다 할지라도 구속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기간이다. 그것은 모세와 다윗의 시대만큼이나 독특하다. 이 기간은 새로운 출애굽, 곧 바빌론으로부터의 회복과 함께 시작한다. 그것은 성전의 재건과 더불어 지속되며, 여호수아가 이끈 영토 정복과 솔로몬이 이끈 성전 건축 두 가지 모두를 반복한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들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포함한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왔을 때,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로서 세워진다. 야웨는 다윗의 집을 높이고 이스라엘을 왕정 체제 곧 열왕의 나라로 만든다. 바빌론으로부터 회복하는 동시에 이스라엘은 역사의 세 번째 국면으로 들어간다. 열방 가운데 둥지를 튼 이스라엘은 선지자적 백성이 되며, 세상에 증인이 되라는 부름을 받는다.
--- 1장 새 언약 중에서
이것은 기묘한 이야기, 예수님 이야기다. 유대인들에게 이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요점을 피해 가는 이상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역사의 마지막 장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스라엘의 모든 소망?원수들로부터의 구원, 죄의 용서, 승리와 높아짐, 에덴의 회복, 열방의 회심,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땅?이 모두 예수님을 통해 실현된 것이다. 열심당원들의 칼이나, 바리새인들의 엄격한 정결이나, 사두개인들의 정치적 타협이나, 에세네파의 은둔을 통해서가 아니다.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유대인, 다른 종류의 거룩함, 다른 긍휼과 섬김과 고난과 죽음이라는 줄거리로 결론 맺는다. 그리고, 모든 것의 위에 모든 것을 변혁하는 부활이 있다.
--- 2장 예수님 이야기 중에서
복음서들을 네 악장의 교향곡으로 읽을 때, 우리는 성장과 성숙을 본다. 예수님은 유대의 메시아이시지만 그 이상이시며,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이시지만 그 이상이시며, 예수님은 온 세상의 구원자이시지만 그 이상이시며, 예수님은 육신이 되신 말씀이시다. 바로 그것이, 4분의 3 정도 혹은 조화로운 정도 혹은 잘 엮어진 정도의 복음이 아닌, 우리가 갖길 하나님이 바라시는 예수님의 네 차원의 초상화다. 강에서부터 바다까지, 세상의 네 모퉁이까지 복음으로 정복하실 4중의 예수님이다.
--- 3장 사복음서 중에서
첫 번째 복음서의 시작과 끝을 함께 놓고 볼 때, 우리는 마태가 구약성경의 이야기 전체를 포함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계보에서 시작하는데, 심지어 ‘창세기’(Genesis)라는 단어를 첫 구절에 사용한다. 또한 이방인들에게로 “가라”고 하는 위임령으로 끝마친다. 창세기에 대한 암시로 시작하여, 고레스의 칙령과 같은 위임령으로 마친다. 그는 구약성경의 알파로부터 오메가로, A로부터 Z로, 창조로부터 회복으로 이동함으로써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작과 끝에서, 마태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곧 이스라엘이며, 예수님의 이야기는 곧 되풀이된 이스라엘의 이야기라는 단서를 준다. 예수님은 이집트에서 나오도록 부름받은 그 “아들”이시며(참고. 출 4:23), 복음서의 끝에서도 그 아들로 남으신다. 마태는 이스라엘 이야기의 되풀이로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 4장 마태복음 중에서
마가는 복음서의 시작에서 “주의 길”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그 표현에 상징적 요소를 가득 채운다. 이사야에서 주님이 여행하시는 ‘길’은 포로 귀환의 길, 출애굽의 길, 광야를 지나는 길, 약속된 땅을 향한 길, 하나님의 용사가 배후에 있는 정복의 길이다. 마가복음의 독자들은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자신을 발견할 때,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그들의 여정이 하나님의 용사의 승리의 행진, 그가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하며 시온으로 향하는 승리의 길, 눈먼 자가 볼 수 있고 사막에 꽃이 피게 하는 길임을 인지한다.”
--- 5장 마가복음 중에서
누가는 사도행전에 이르기까지 특정 주제들과 사건들을 미룬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성전을 무너뜨리겠다고 위협하셨다는 고발은 마가가 예수님의 재판을 기록할 때 등장하지만(14:58), 누가의 기록에서는 이 고발이 스데반의 일화가 있기까지는 나오지 않는다(행 6:14). 음식의 정결에 관한 마가복음 7장의 기록은 누가복음에 없지만, 그 개념은 고넬료와 베드로의 꿈 이야기와 함께 사도행전 10-11장에서 채택된다. 누가는 8장 10절에서 이사야 6장을 일부 인용하지만(막 4:12과 비교하라), 사도행전 28장 25-27절에서 그보다 폭넓게 인용한다. 이것으로 누가는 유대인들의 완고함과 모호함의 완성, 마지막 눈멂이 예수님에게서뿐 아니라 제자들에게서 복음을 듣기 전에는 일어나지 않음을 보여 준다. 유대인들은 제자들의 설교를 들은 후에야 완전히 완고해진다. 누가복음-사도행전이 엮인 책은 분명히 예수님과 교회에 관한 것이다. 누가는 예수님과 교회에 대해 특정한 요점을 만들기 원한다. 그 요점을 보려면, 우리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구조들 일부를 검토해야 한다.
--- 6장 누가복음 중에서
요한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말하며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한다(요 1:18). 이것은 문젯거리다. 요한에게는 보는 것이 아는 것이며(6:40; 11:45; 14:7), 성부와 성자를 앎/봄이 곧 영원한 생명이다(17:3). 만일 성부가 감추어져 있으시다면, 우리는 생명으로 가는 길을 결코 찾을 수 없다. 우리에겐 그분을 볼 어떤 길이 필요하다. 요한에게 그 좋은 소식은 곧 그런 길이 있다는 것이며, 그 길의 이름이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요한은 하나님 아버지의 보이지 않으심에 대해 말할 때, 철학적 주장을 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시지만(골 1:15-16과 딤전 1:17을 보라), 요한의 주된 요점은 역사 속 구원의 진전에 대한 것이다. 성부는 지금까지 눈에 보이지 않으셨다. 하지만 당신이 예수님을 본다면, 그 아버지도 보는 것이다.
--- 7장 요한복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