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6월 26일 일요일, 아들 신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옹진지구 시찰을 수행하기 위해 새벽같이 경교장을 떠났다. 오전 11시 30분경 포병 소위 안두희가 방문하여 김구를 뵙기를 청했다. 안두희는 45구경 권총을 차고 있었지만 일전에 한국독립당 조직부장 김학규의 소개로 이미 경교장을 찾은 바 있었기에 그대로 방문이 허락되었다. 12시 40분을 조금 지난 시각, 식모 아주머니가 오찬으로 준비 중인 만둣국이 다 되어 간다고 말했다. 그 순간, 안두희가 올라갔던 2층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났다. 안두희가 손에 권총을 든 채 고개를 숙이고 내려왔다. 그는 권총을 계단에 떨어뜨리며, “선생님을 내가 죽였다”고 자백했다.
암살 위협 속에서 “나라를 위해 왜놈이 죽일 일은 했어도 내 민족에게 죽을 일은 안 했다”라고 말했던 김구는 같은 민족, 그것도 한때는 그를 따랐던 33세 국군 장교의 흉탄을 맞은 것이다. 김구의 사망 진단은 성모병원 원장이자 그의 주치의였던 박병래가 맡았다. 김구의 유해는 경교장 2층 침대 위에 모셔졌다. 주치의 박병래는 적십자병원에 연락해서 김구의 데스마스크를 뜨게 했다. 김구의 장례는 한국독립당이 주장한 민족장과 대한민국 정부가 고려한 국장을 절충한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백범김구선생국민장위원회 위원 등이 중심이 되어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가 만들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p.29~31,「경교장-반탁의 중심에서 서거의 현장으로」
1948년 3월 12일 오전 9시 45분 김구는 군사재판이 열리는 미군정청 제1회의실로 미군 헌병에 인도되어 법정 한가운데에 있는 증인석에 자리를 잡았다. 오후 4시 30분까지 이어진 증인 심문에서 김구는 “나는 왜놈 이외에는 죽일 리가 없다”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1948년 3월 15일 두 번째로 소환되어 증인 심문을 받는 자리에서 김구는 답변을 거절했다. 자신을 죄인이라고 보면 기소하여 체포하든지, 증인이라고 보면 자신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니 퇴정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김구로서는 장덕수가 피살된 데 대해 누구보다도 자신이 더 분하게 생각하는 마당에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하는 것에 대해 기가 막힌다는 심정에서 한 말이었다. 법정을 나온 김구는 증인으로 소환되어 심문받게 된 것에 대한 소감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과거 수십 년 해외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분투하던 김구는 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로 고국에 돌아왔으니 삼천만 동포 앞에 허물을 받음이 마땅하거늘, 도리어 해외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보다도 안일한 생활을 하게 되고 국내 동포로부터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하느님이 꾸짖으시며 징계하시는 뜻으로, 나로 하여금 미군 법정에 나가서 과거에 내가 왜놈의 법정에서 당하던 단련을 다시 한 번 맛보게 하시는 뜻으로 생각하고, 마음속에 많이 뉘우치게 되었다.
통일된 자주독립 국가를 수립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괴감을 이같이 토로한 김구는 법정에서 나오는 길로 효창공원에 모신 삼의사 묘소에 참배하고, 선열의 영 앞에서 참회의 묵도를 올렸다. 그리고 다시는 미군정청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p.97~99,「미군정청-조선총독부에 뒤이은 새로운 권력으로」
김구가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를 다녀오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김구에게는 정치적으로 무척 어려운 시기였으며, 김구가 있는 경교장은 찾아오는 사람이 격감하여 적막하였다. 그해 연말인 12월 31일, 김구는 서울 시내 각처를 순례하며 집 없이 굶주림에 떨고 있는 빈궁한 동포들에게 총9 0만 원의 거금을 희사하였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이후 김구는 가정의 현안 문제들을 연달아 처리하였다. 8월 20일 어머니 곽낙원 여사, 부인 최준례, 맏아들 김인 3인의 유해 봉환식, 1948년 10월 7일 이 3인의 묘비 제막식이 있었으며, 12월 18일에는 남대문교회에서 차남 김신의 결혼식이 있었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1948년 연말에 희사한 90만 원의 돈은 곽낙원, 최준례, 김인 3인의 유해 봉환식에 들어온 부의금과, 둘째 아들 김신 결혼식 축의금의 일부라고 한다. ---p.157,「백범학원과 김구주택-어리오나 저의 4백여 백범이 또 있아오니」
이날 김구는 지난날 생사를 함께하다 먼저 순국의 혼백이 된 동지 삼의사의 유골을 받들고 서울로 향하면서 국민에게 다음과 같은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 세 사람을 죽으라고 내보낸 것은 바로 나입니다. 그러나 그 세 사람을 보내고 나만이 살아 있으면서 아직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삼열사에 대하여 부끄럽기 한량없고, 회고를 금할 수 없습니다. 조국을 위하여 심령을 바치고 지하에 잠드신 선열과 충의지사가 어찌 삼열사뿐이리오만 대담무쌍히 왜적의 심장을 향하여 화살을 던져 조선 민족의 불멸의 독립 혼을 중외에 떨친 것은 아마 이 세 분이 으뜸일 것입니다. 나는 지금 유골을 모시면서 스스로 부끄러운 생각을 억제할 수 없으며 그들[과 함께] 지하에 불귀의 손이 된 몇만 몇천 명의 동지들의 사심 없는 애국의 지성을 본받아 하루 바삐 통일된 우리 정부의 수립이 실현되도록 삼천만과 같이 분골쇄신 노력하겠습니다. ---p.247~249,「삼의사 천장식-태고사에서 효창공원에 이르는 길」
인천항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기 직전, 김구는 장티푸스에 걸려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했다가 겨우 살아난 만신창이 상태로 간수의 등에 업혀 경무청으로 들어갔다.
인천항 전체에 큰 파장을 몰고 온 김구에 대한 신문 내용은 『백범일지』에 매우 드라마틱하게 기록되어 있다. 1896년의 인천감리서 경무청에서 열린 첫 신문이 그만큼 김구 자신에게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1929년 『백범일지』 상권에서는 이 재판정에서 김구가 조선인 관리를 통렬하게 꾸짖는 기개를 보여 주었다. 제2차 신문도 옥문 밖의 경무청에서 진행됐는데, 첫 번째 재판 소식이 알려져 “길에는 사람이 가득 찼고 경무청 안에는 각 관청의 관리와 항구의 유력자들이 다 모인 모양이었다. 담장 꼭대기와 지붕 위까지 경무청 뜰이 보이는 곳은 어디나 사람들이 다 올라가 있었다”고 『백범일지』에서 묘사하였다. 김구는 세 번째 신문은 감리서에서 했다고 기록했는데, 이재정이 친히 신문을 하고 왜놈은 보이지 않았는데, 신문서 꾸민 것을 보고 고치게 한 후 서명을 해서 신문을 마쳤다고 했다.
---p.274, 「인천감옥-22세에 사형수가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