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물네 번째 책인 이 책으로 인해 성취감을 느낀다. 나는 영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만족스러운 곳에 도달했다. 나의 인생은 여전히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여정이며, 그 신비는 계속해서 더욱 깊어지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이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선택할 수 있는 의사소통의 도구인 단어들을 찾을 수 없게 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로움에 빠져들게 된다.
내가 요한복음에 대한 가장 부정적인 영향을 경험한 것은 교회의 신조들과 강요된 도그마(dogma)의 발전에 이 복음서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 때문이다. 이 책이 “정통 그리스도교(orthodox Christianity)”를 분명하게 설명하는 책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요한복음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이단사냥과 종교재판 같은 무서운 사건들을 부채질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본성(the nature of the Christ)에 대한 의미 있는 담론을 만드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이처럼 수많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한 통찰력을 갖고, 나는 요한복음 연구에 착수하여 5년간 몰두했다. 이것은 내 인생 전체에서 가장 풍부한 연구 경험 중 하나였다. 그 기간 동안 매일 신문을 읽는 것과 내가 추천하거나 리뷰하기로 동의한 책 말고는, 오로지 요한복음서에 대한 재료들만 읽었다. 나는 19세기와 20세기, 21세기에 나온 요한복음에 관한 거의 모든 중요한 영어 주석을 읽었다. 또한 20세기에 출판된 학술적인 신학 잡지들과 성서학 잡지들에 실린 요한복음 관련 논문들도 훑어보았다.
우선, 나는 점차 요한복음을 유대인들의 책으로 보게 되었다. 요한복음은 20세기 초반의 학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일차적으로 영지주의적(Gnostic) 작품이나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문서가 아니며, 또한 예루살렘과 아테네를 합치려고 했던 1세기 유대 철학자인 필로(Philo)의 저술과 비슷한 종류의 책도 아니다. 요한복음은 오히려, 내가 발견하기 시작한 것과 같이, 진정으로 팔레스타인-유대인들의 책이었다.
이것은 본래, 마치 신과 인간이 두 개의 분리된 실재인 것처럼, 신이 인간의 몸의 형태로 침입하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헬레니즘의 이원론적 경험이 아니다. 요한복음 서문에서 예수와 하느님의 관계는 클락 켄트와 슈퍼맨의 관계와 똑같은 방식으로 그려지지 않았다. 달리 말하자면, 예수는 인간으로 위장한 하느님으로 그려지지 않았다. 요한복음 저자는 그 서문에서 인간이 하느님과 가질 수 있는 신비한 합일(the mystical unity)을 표현하기 위해 잠언의 지혜에 대한 찬양에 기초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찬양을 사용하거나 만들어냈고, 또한 이것이 사실 나사렛 예수의 독특한 점이었다고 주장한다.
요한복음은 아마 성서의 어떤 다른 책들보다도 문자주의를 조롱하고, 끊임없이 그것을 비웃는 책일 것이다. 누군가가 요한복음에 어떤 방식으로든 문자주의를 적용하려 한다면, 그는 이 책이 강조하는 심오한 의미에 대해 눈을 감아야 할 것이다. 신비주의의 눈은 결코 문자주의의 눈이 될 수 없으며, 이 복음은 신비주의의 눈, 좀 더 구체적으로는, 유대 신비주의의 눈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종교를 이용해서 자신의 안전(security)이라는 예측 가능한 경계선들 안에서만 볼 수 있도록 자신의 능력을 묶어놓았던 니고데모라는 인물에게 요한복음의 예수가 대화를 통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처럼 안전을 위한 종교는 요한 자신이 예수 안에서 경험한 것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요한은 예수로 하여금 세상에 매여 있고 육체의 한계들에 갇혀 있는 니고데모의 눈을 뜨도록 하기 위해 애쓰게 만든다.
이 지점에서 사람들은 이 여인이 사마리아에 대한 신화적인 한 상징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이 본문이 마치 그녀의 방탕한 성적 성향에 대한 언급인 것처럼, 도덕주의적으로 읽게 된다. 사람들은 이 여인이 자신의 수상쩍은 과거에 대한 대화를 예배를 위한 적절한 장소에 관한 논쟁으로, 느닷없이 화제를 바꾸려고 시도한다고 주장하기까지도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그런 방식으로 읽으면, 그 의미를 완전히 놓치게 된다.
예수는, 생명의 원천(the source of life)이며, 사랑의 원천(the source of love)이며, 존재의 근거(the Ground of Being)인 하느님과 신비한 합일(the mystical oneness with the God)을 이룬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말할 수 없는 경외감을 체험하며 요한복음을 마무리한다. 이 책에서 나는 “나는 …이다(I AM)”라는 위대한 하느님과 마주쳤고, 그 결과 이제 나 역시 “나는 …이다(I am)”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더 나아가 나는 다른 사람들도 “나는 …이다(I am)”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 존재의 선물 속에서 나는 살아가고, 기뻐하고, 영원을 경험한다. 이것이 내가 어느 유대인 신비주의자의 이야기인 요한복음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