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47 --- 게다가 퓨마 쪽에서 보자면,산 속에서 혼자 폴짝 폴짝 뛰고 있는 인간은 '이지 플라이(안성맞춤의 먹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그러니 사람을 덮쳐서 잡아먹는 것은 퓨마로서의 '당연한 영업행위'아니겠는가....... 어쨌든 산 속에서 갑자기 퓨마의 습격을 받아잡아먹히는 것은 그다지 기분 좋은 사망 방법은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지금부터라도 미국의 산 속에서는 가급적 달리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이런 표현을 보고 뭐라고 하실 분도 계실 지 모르겠지만,결코 경박하지 않다.그리고 진지하게 무겁지 않게 생각하게 한다!(미국의 산 속에서는 달리지 말아야지...가게 되면,그리고 자연의 섭리랄까...)
p.192--- '어째서 일본인들은 정신적으로 심각한 상처를 입은 어린이들을 돌보기 위한정신과 의사나 카운셀러를 충분히 확보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별 필요도 없는 사람들이 줄줄이 따라올 정도라면 그런 전문가를 데리고 가야 하는 것아녜요?'....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상처가 .....일본관청의 관료주의적인 어리석음을 ...---할말은 콕 집어서 한다.소리 높이지 않고 부드럽게..!
p.213--- 그러나 솔직히 말해,한달에 두 번씩 납짝 업드려 나무 바닥에 왁스칠을 하는 건 괴로웠어요.스티브...---상상만 해도 재미있다.친절하지만 집을 깨끗하게 써 줄 것을 은근히 부탁하는 집주인 스티브를 위해 열심히 왁스칠을(납짝 업드려)하는 하루키... 기타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인상 깊은 구절이 많다.
--- p.
한낮에 햇빛이 잘 드는 호텔의 테라스에 앉아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샤이나 포크 맥주를 마시거나, 근처에서 배회하는 고양이와 놀거나 하면서 느긋하게 텍사스의 따뜻하고 마음 편안한 봄날을 보냈다. 그렇게 소일하노라면 남부에서 '테라스가 있는 생활'이라는 것은 참으로 여유롭구나 하는 실감이 든다.
--- p.35
존 어빙의 대장편 소설인 <서커스의 아들>을 모두 읽고 나면 감상을 쓰겠다고 말해 놓고 깜빡 잊어버렸다. 간단히 쓰겠다. 나는 어쨌든 마지막까지 전부 다 읽었고, 그렇게 긴 소설을 끝까지 싫증내지 않고 재미있게 읽도록 만드는 것은 언제나 그렇지만 참으로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 이야기는 무대가 처음부터 끝까지 인도였고, 주인공도 인도인, 등장 인물도 모두 인도인으로, 모든 것이 마치 카레처럼 강렬한 소재였다.
게다가 소설이 워낙 길기 때문에, 그 설정이 도중에 약간 골치 아프게 전개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작가가 의욕적으로 글을 썼다고 한다면 분명히 그렇긴 하다. 존 어빙의 소설에는 늘 마지막 부분에 코끝이 찡해 오는 깊고도 독특한 슬픔이 있는데 (그리고 그게 그의 장편 소설의 매력적인 요소인 것 같다). 이 소설에서는 그런 감정을 기대할 수 없었다.
--- p.127
작가마다 다른 작업시계
최근에는 소설을 열심히 쓰고 있기 때문에, 매일 아침 다섯 시경에 일어나 작업에 몰두하다가 밤 아홉시가 지나면 이미 침대에 들어가 잠드는 생활이; 규칙이 되었다. 나의 경우, 장편 소설을 쓰고 있을 때는 아무래도 이 생활 형태가 가장 이상적인 패턴인 모양인지 언제나 대개 그런식으로 되어 버린다. 자연스럽게 졸음이 오고, 자연스럽게 잠이 깬다. 물론 작가에 따라 각자 여러 가지의 작업 패턴이 있다.
언젠가 어떤 출판사가 소유한 산장에서 하시모토 오사무 씨와 일주일 가량 함께 일을 한 적이 있는데, 매일 한 번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말고는 거의 마주친 적이 없었다. 하시모토씨는 밤 아홉 시경부터 서서히 작업을 시작하고, 나는 대체로 그 시간대에는 잠자리에 드니까, 같은 시각에 저녁 식사를 하는 것 외에는 생체 시계가 완벽하게 엇갈렸던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이 교대제로 24시간 편의점이라도 경영하면 편리할지도 모르겠다.
--- p.100
자메이카에는 FM 방송국이 상당히 많이 있지만, 어느 방송국의 어떤 프로그램을 틀어도 전부 레게 음악 일색이다. 이 섬에는 레게 음악 외에는 음악이라는 게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실제로 와서 보면 직접 체험할 수 있겠지만, 하여튼 엄청나다.
섬 전체가 '응차, 응차'라는 리듬과 퍼플 헤이즈로 넘쳐 흐른다. 덕분에 눈으로 뒤덮인 보스턴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응차, 응차'의 리듬이 몸 안에서 끈질기게 계속되고 있다. 쉽게 레게 음악에 젖어버린 것 같다. '응차, 응차'
--- pp.152-153
이것은 '버몬트 강의 다리'이다.아이오와의 다리에 비해서도 결코 손색이 없다.나는 벽의 틈새로 얼굴을 내밀고 프란체스카 부인을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프란체스카부인은 오지않았다.그 대신 갑자기 토끼 한마리가 뛰쳐나와서 콘크리트 블록에 머리를 부딪히고 기절했기 때문에. 그것을 강변에서 맛있게 구워먹었다........
--- p.73
예를 들면 꾹 참고 격력하게 운동을 한 뒤에 마시는 차갑게 얼린 맥주 한잔 같은 것이다. '그래, 바로 이맛이야!' 하고 혼자 눈을 감고 자기도 모르는 새 중얼거리는 것 같은 즐거움, 그건 누가 뭐래도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참된 맛이다. 그리고 그러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없는 인생은 메마른 사막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 p.123
사실 나는. 자기 집 정원을 언제나 깨끗하고 소중하게 손질하는 스티브가, 이따금 정원에 똥을 누고 가는 모리스 아니 코타로(하긴 나도 몇번인가 그 현장을 목격했다)를 미워한 나머지 쥐약이나 다른 뭔가를 사용하여 독살하고, 몰래 어딘가에 묻어 버린 게 아닐까 하고 속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스티브가 이사간 코타로를 그리워하고 있다니, 솔직히 말해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지만, 근거 없이 사람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 p.210-211
봄이 찾아와도 고양이들은 특별히 감동하는 기색도 없이, '이렇게 될 줄 다 알고 있었다니까.......'하는 식의 당연한 얼굴로 느릿느릿 밖으로 나온다. 하긴 그런 무감동함이 고양이의 좋은 점이긴 하다.
--- p.184
보고 있노라면 낙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들지 않는다. 생각해 보라. 기분 좋게 잠을 자고 있다가 끌려 나와, '아니, 이런'하고 생각하고 있을 동안에 세탁기에 집어넣어져 '탈수'당하면, 정말 견딜 수 없는 일이다. 정말 그런 식으로는 죽고 싶지 않다.
--- p.222
대문호 톨스토이는 일찍이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대개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의 모습은 전부 각각 다르다'는 의미의 글을 썼다. 이 말은 확실히 인간의 얼굴에도 해당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굉장한 미인'이라고 말하면 대개 그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머리가 아찔할 정도로 어처구니없이 못생긴 추녀'라고 말하면 전혀 그 이미지가 떠오르질 않는다. 나만 그런가?
--- p.174
눈내린 거리의 고양이 사진밑에-
-2월의 거리에 있는 고양이. 보기에도 추워 보인다.
'아, 춥다. 추워! 이런날에는 밖에 나오고 싶지 않은데' 라는 태도가 역력하다. 꼬리도 우뚝 솟아 있고 이 고양이에게는 틀림없이 밖에 나오지 않으면 안 될 뭔가 중요한 볼일이 있었으리라. 가령 오늘 발매될 예정인 파르장의 신곡 CD를 사러 간다던지......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말이다.
그림같은 화와이 해변 사진 밑에-
-하와이 해변 풍경. 정말 하와이다운 풍경이다. 10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무게가 7킬로그램은 될 자동차 타이어로 고리 던지기 놀이를 하여, 셋 다 멋지게 들어갔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단지 대여하는 바퀴 모양의 튜브가 놓여 있을 뿐이다.
--- p.175,---p.221
그렇기 때문에 내가 '밤에는 대개 열 시에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는 여섯 시에 일어나 매일 조깅을 하며, 한 번도 원고 마감일을 넘긴 적이 없다'고 말하면, 깜짝 놀라며 '아 그런 문인도 있습니까?' 하는 표정을 짓는 이도 적지 않다(다시 덧붙이지만, 일찍부터 나는 숙취라든가 변비, 두통, 어깨 결리는 것은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다.) (p. 16)
(......)
'하지만 작가가 지나치게 건강하면 병적인 집념(이른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싹 사라져 버려서 문학이라는 게 성립되지 않는 것 아닙니까?'하고 지적하는 사람도 물론 있다.
그러나 나에게 그 질문에 대답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얘기하겠다. '그 정도로 쉽게 사라져 버릴 정도의 가벼운 어두움이라면 그런 것은 처음부터 문학으로 승화될 수가 없습니다.' (pp. 17-18)
--- p.16, pp.17-18
그런데 마라톤에 참가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상당히 불가사의한 체험이다. 이를 경험하는 것과 경험하지 않는 것과는 인생 그 자체의 색깔도 조금은 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종교적인 체험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거기에는 뭔가 인간 존재에 깊숙이 와닿는 것이 있다.
42킬로미터를 실제로 달리고 있을 때는, '도대체 내가 왜 일부러 이런 지독한 꼴을 자처하는 거지? 이래 봤자 좋은 일은 하나도 없지 않은가? 아니, 오히려 몸에 해로울 뿐이지(발톱이 벗겨지고, 물집도 생긴다. 그 다음날에는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힘이 든다)' 하고 상당히 진지하게 스스로 캐묻는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결승점에 뛰어 들어가 한숨 돌린 다음 건네어진 차가운 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뜨거운 욕조에 잠긴 채로 바늘 끝으로 발바닥에 부풀어오른 물집을 따낼 무렵에는, '자아, 이젠 다음 레이스에서는 더 분발해야지'하고 다시 마라톤에 대한 의욕으로 불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건 도대체 어떤 심리 작용일까? 인간에게는 이따금 자신을 알 수 없는 극한 상황까지 몰고 가 보려는 내재된 욕망 같은 것이 있는 것일까?
--- p.24
결국 구두쇠가 안니냐는 말을 들을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다. 생활속에서 개인적인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기위해서는 크든 작든 철저한 자기 규제 같은 것이 필요하다. 예를들면 꾹 참고 격렬하게 운동을 한 뒤에 마시는 차갑게 얼린 맥주 한 잔 같은 것이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하고 혼자 눈을 감고 자기도 모르는 새 중얼거리는것 같은 즐거움, 그건 누가 뭐래도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참된 맛이다. 그리고 그러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없는 인생은 메마른 사막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 p. 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