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D 354~430)는 일생에 걸쳐, 일관되게, 열정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다. 물론 그는 탁월한 지성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그의 삶을 움직인 근본 동력은 ‘안달하는 마음’restless heart, 하느님과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불길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상징하는 문양은 사랑의 불길로 타오르는 심장인데 종종 이 심장 아래 성서가 놓여 있는 때도 있다. 이는 그의 열정 어린 삶, 그리고 열정 어린 설교를
잘 보여 준다. 그는 이생에서 겪을 수 있는 여정 중 가장 긴 여정인 신앙이라는 여정을 향한 갈망이 우리 안에 있음을 알았다. 때로 우리는 이 여정을 정신mind에서 시작한다. 시작점이 어디든, 신앙의 여정을 걷는 모든 이는 마음heart이라는 길을 통과해야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증인의 삶, 섬기는 삶을 살려는 우리의 의지에 불
이 붙어야 한다.--- pp.15-16
회심은 단 한 번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어지는 과정에 가깝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원에서 인생이 뒤바뀌는 회심의 순간을 경험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거기서 회심이 끝나지는 않았다. 이후 그는 계속 분투했다. 그리고 “바람이 제가 불고 싶은 대로”(요한 3:8) 불 듯,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분인 성령이 그가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인도하셨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을 기록한 것은 정원에서 일어난 한 번의 사건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고백하려 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고백록』을 씀으로써 이러한 생각을 단연코 반대
했다. 회심은 끝이 아니었다. 이후에도 그는 죄와 싸워야 했다. 세례받은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연약하고 실패하는 인간으로 살아갔다. --- p.45
불가지론과 무신론의 시대에 사람들은 아무것도 안 믿게 되는 게 아니라 아무거나 믿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매혹적인, 그러나 위험한 반쪽 진리가 종교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듯 사람들은 이를 붙잡는다. --- p.41
기존에 있던 자리에서 이탈하는 것, 제자리에 정착하는 것, 이 두 활동은 서로를 보완하며 서로를 수정한다. 기존에 있던 자리에서 이탈해 새롭게 자리를 잡는 것은 모든 인간관계를 유지할 때 좋은 태도이며 하느님을 알아갈 때도 우리가 견지해야 할 태도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개념과 상은 유한하다. 이러한 한계에 묶여 있기에 우리는 하느님을 다 알 수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우리가 가진 개념과 상을 다시금 조정해야 한다. 실제 순례자들이 그러하듯 신앙의 순례자들인 우리 또한 기존에 머물고 있던 곳을 떠나 길가에 있는 임시 거처에 잠시 머무르면 다시금 그곳을 떠나야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잠시 엿보았던 하느님 영광의 더 커다란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그분이 바라보시는 것을 우리 또한 볼 수 있게 된다. --- p.125
좋은 일이든 가슴 아픈 일이든 큰 일을 겪고 나면 우리는 잠시 물러서서 곰곰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자동차로 먼 길을 여행하다가 재충전을 하려면, 혹은 어디쯤 와 있는지 살피려면 도로에서 벗어나 잠시 멈춰서야 하듯 말이다. 신앙의 여정을 걷는 중에도 새롭고 중요한 통찰을 얻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완전히 새로운 전망, 새로운 관점으로 상황을 바라보게 되는 때가 있다. 이러한 통찰력을 온전히 흡수하기 위해서는 잠시 물러서서 시간을 가져야 한다. 새로운 시각을 바탕으로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지고 이제껏 가지고 있던 삶에 대한 견해 또한 새롭게 조정해야 한다. 차차 알게 되겠지만, 이렇게 물러서서 곰곰이 생각해 보는 일은 단번에 끝나지 않는다. 때마다 물러서서 생각하는 것 역시 우리 여정의 일부다. --- pp.153-154
사고에서 갈망에, 세례에서 하느님의 비전에 이르는 여정은 모든 여정 중에서도 가장 긴 여정이며 우리가 누구인지 알게 될 때까지, 우리가 본래 창조된 모습을 갖게 될 때까지 이어진다. 여정을 먼저 떠난 이들은 모든 순례자가 이 긴 여정을 이어가도록, 낙담하여 포기한 채 길에서 쓰러지지 않도록 돕는다. 이것이 교회의 사역이자 사명이다. 그러나 이 모든 여정에서 지점마다 필요한 연료를 제공하고 목표 지점을 향해 나아갈 의지에 불을 붙이는 것은 우리의 갈망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매일 명백히 모순적인 자신의 상태(세상이 보기에는 이러하다)를 자각하며 여정을 이어가야 한다. 그렇게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다. 과거 우리의 모습, 죄된 성향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남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에게는 죄에서 자유로워진,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고요한 내적 확신이 있다. 이처럼 모든 그리스도교 순례자들은 (신학적인 용어를 쓰자면) ‘의로워졌음’과 ‘여전히 죄인’이라는 두 모순된 표지판 사이로 길을 걸어간다. --- p.194
어떠한 형태로든 어떤 일을 접게 되는 시기에는 우리 영혼이 상처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 뒷받침하는 실제적인 증거는 많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퇴직을 하면 병에 걸린다. 부부의 경우 아이가 독립하면, 시부모(혹은 장인, 장모)를 요양원에 보내면 서로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오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허나 정작 그런 날이 오면 바람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결혼이든 우정이든, 이타적으로 타인을 섬길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관계, 자기 자신만을 유익하게 하려는 관계는 부패하기 마련이다. 오늘날 시중에서 팔리는 영성과 그리스도교 영성의 차별점이 정확히 이 지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나’의 내면을 마사지해주는 데, 그리하여 ‘나’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는 데 관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타인’을 섬기고, ‘타인‘에게 헌신하는 삶을 가리킨다.
--- p.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