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은 물리적 영역만큼이나 문화적 영역에 존재하므로 모든 색을 목록에 담으려는 시도는 끝이 없다. 예를 들어 난색과 한색의 두 무리로 색을 나눈다면, 주저 없이 빨간색과 노란색은 난색, 녹색과 파란색은 한색이라 분류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분류는 고작 18세기에 비롯되었다. 중세 때 파란색을 난색, 한술 더 떠 가장 뜨거운 색이라고 여겼다는 근거가 있다. -옛 물감 차트, 26쪽
그게 베이지색이 짊어진 평판 문제의 핵심이다. 나서지 않고 안전하지만 너무 칙칙하다. 베이지색으로 꾸민 임대 공간에 방문하면 금세 질린다. 몇 시간 만에 건물 전체가 한데 어우러져 이를 악물고 일궈낸 무해함의 바다처럼 다가온다. 집을 파는 비결을 다루는 요즘의 책은 아예 베이지를 쓰지 말라고도 못 박는다. -베이지, 59쪽
여신들, 동화의 남녀 주인공들, 모델들은 전부 금발이다. 금발의 여종업원은 팁을 더 많이 받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2번 염색체에 G(구아닌) 대신 A(아데닌)를 가지고 태어날 정도로 운이 좋지 않다면 염색이라는 대안이 있다. 1960년대 클레이롤의 염색약 광고에 등장하는 문구처럼 ‘한 번 산다면 금발’이다. -블론드, 68쪽
요즘은 옷부터 자전거 헬멧, 요실금 패드까지 여성을 위한 제품이 남성이나 소년을 위한 것과 똑같은데도 더 비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14년 11월 프랑스의 여성부 장관인 파스칼 부아스타르는 ‘핑크색이 사치의 색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마트에서 핑크색 일회용 면도기가 1개에 1.93달러인 데 반해 파란색 일회용 면도기는 10개 들이에 1.85달러에 팔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이제는 ‘핑크 세금(pink tax)’라고 일컫는다. -핑크 계열, 121쪽 압생트의 진짜 문제는 55~75퍼센트의 높은 도수였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사회 격변 탓에 압생트를 많이 마시고 알코올 중독이 늘었다는 의미다. 장 랑프레의 사건이 흔한 예였다. 그는 가족을 살해했지만 압생트 두 잔 말고도 와인, 브랜디, 그리고 더 많은 와인을 마셨다. 취한 탓에 심지어 가족을 죽인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상관없는 일이었다. 향정신성 의약품에나 어울릴 따르기 의식, 노동계급과 반문화 추종자들, 찝찝하도록 독약의 분위기를 풍기는 녹색 덕분에 압생트는 완벽한 희생양으로 전락했다. -압생트, 225쪽
흙과 피로 얼룩진 4년 반 뒤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며 카키는 군대의 상징 색으로 자리 잡았다. 징집 또는 거부를 당한 남성은 작은 빨간 왕관을 수놓은 카키색 완장이나 팔찌를 착용했다. 그리고 전쟁 발발 후 몇 달 동안 격앙된 젊은 노동 계급 여성이 팔찌에 너무 공격적으로 반응해 ‘카키 열병’이라고 놀림받게 되었다. ‘카키색을 입지 않겠습니까?’라고 독려하는 포스터나 감상실에 울려 퍼지는 노래, 제복8 등을 통해 눈에 잘 안 띄는 카키는 끊임없이 자기 자리를 넓혀나갔다. -카키, 2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