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 가드닝은 살아 있는 생물을 닮았다는 점에서 일종의 유기체 운동이다. 해로운 식물이 그렇듯 게릴라 가드닝은 어느 사회의 환경이 게릴라 가드닝에 유리하도록 만들어지면 급격하게 발생하곤 했다. 한 이랑에 심어진 씨앗들이 다른 이랑으로 옮겨 가 꽃을 피우듯이 게릴라 가든은 처음에 생길 때 그 지역의 조건 에 따라 모양이 갖추어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마치 어느 속 안에서 새로운 종이 생기듯 새로운 성격을 가지게 된다. 그런 유기체적인 변화가 눈에 띄지 않는 것은 게릴라 가드닝의 모습이 대단히 다양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샐비어(Salvia)라는 속의 식물과 닮았다. 샐비어 속에는 900개의 종이 있다. 어떤 종은 바위투성이 비탈에 자라고 또 어떤 종은 축축한 초원에서 자란다. 어떤 종은 화려한 꽃을 피우고 어떤 종의 꽃은 연한 녹색 안에 숨어 우리의 눈길을 피한다. 어떤 종은 한해살이 풀이지만 다른 종은 여러해살이 떨기나무로 자란다. 마찬가지로 게릴라 가드닝도 이 지구상 모든 곳에서 엄청나게 다양한 모습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전쟁과 꽃밭 일은 창조와 파괴라는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화초와 권력은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버려야 하는 관계가 아니다. 싸움과 꽃밭 가꾸기는 인간이 시간이 남으면 하는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그 둘을 연결하는 데는 크게 손이 가지 않는다.
게릴라 가드닝은 자연스러운 본능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그래서 그 모양새도 무척 다양하다. 우리는 장애물을 이겨가며 땅을 가꾼다는 점에서 하나가 된다. 하지만 그 목적이나 결과에서는 전혀 하나가 되지 않는다. 모든 게릴라 가드닝 전사들이 기꺼이 받아들일 선언문이란 없으며 그런 게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 다. 총을 든 게릴라 전사들처럼 각자는 자기가 살고 있는 환경에서 얻은 자신만의 동기가 있다.
게릴라 가드닝을 하는 사람은 공간을 아름답게 꾸미고 싶어 하는 사람과 곡식을 심으려고 하는 사람, 두 종류로 나뉜다. 독일어 낱말에서는 그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치어가르텐(Ziergarten, 조경정원)과 누츠가르텐(Nutzgarten, 수익정원)이라는 구분이 그렇다. 게릴라 가드닝 참여자들은 대부분 공동체에서 자신의 역할이 공익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사사로운 취미가 중심이고 공익은 그에 따라오는 2차 효과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잘 안다. 게릴라 가드닝은 참여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고, 참여자의 이상이나 특별한 메시지를 전하는 강력한 소통 수단이 된다. 공적인 공간에서 활동하는 게릴라 가드닝 참여자들은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그들을 끌어들이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남의 땅에 식용작물을 심는 일은 생계 때문만은 아니다. 식품이 풍부하고 누구나 싸고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에서도 게릴라 가드너는 남의 땅에 식용작물을 심을 것이다. 많은 게릴라 가드너에게 그것은 산업화된 농업에 기대지 않고도 더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음을 시위하는 일종의 상징적인 행동이다. 스스로를 생태주의 전사라고 묘사하지는 않지만, 생태적, 정치적 명분은 게릴라 가드너들에게 점점 더 중요한 동기가 되고 있다. 산타크루즈 노숙자 연합의 설립에 힘을 보탠 앤더스(Anders) 860은 1992년 동료들과 함께 캘리포니아 주정부 소유지 한 곳을 점령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경찰이 그들의 텐트촌을 폐쇄했지만 그들은 게릴라 가드닝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저서 『침입 금지No Trespassing』에서 그는 5년 동안 채소를 키우고 매주 2회 ‘폭탄 대신 먹을거리’(Food Not Bombs)이라는 행동그룹과 함께 노숙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들의 게릴라 가든은 1997년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 자리에는 장난감을 파는 토이즈러스(Toys R Us)와 가전제품 할인매장 서킷 시티(Circuit City)의 진입로가 생겼다.
방해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2005년 여름, 58세의 맬컴(Malcolm) 332는 그런 공무원과 심하게 부딪혔다. 그가 사는 동네는 옥스퍼드의 브래드랜즈(Bradlands)로, 1960년대에 지은 아파트들이 목초지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그는 그전에 경연대회에서 상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정원 전문가였는데, 그의 기준으로 본 공용 공간은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행동에 나선 그는 먼저 쓰레기와 개똥을 치우고 풀을 깎고 잡초를 뽑고 창틀의 화분들을 손보고 자동차 진입방지 말뚝을 새로 칠했다. 그러던 중 운 없게도 시청의 ‘범죄 및 불편 대응팀’이 그의 활동을 알게 되었다. 대응팀이 지역 언론에 설명한 대로 “길고도 비용이 많이 드는 조사 끝에” 맬컴은 공공용지에서 풀 깎기, 퇴비 만들기, 모닥불 피우기, 채소 기르기를 포함해서 모든 별난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명령을 받았다. 이웃을 도우려면 이웃의 서면 동의서를 받아 미리 대응팀 사무실에 제출하라는 지시도 받았다. 아마도 이웃 가운데 누군가가 시청에 이의를 제기한 모양이었지만, 그렇게 맬컴에게 불만을 가진 사람보다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대응팀 사건 이래로 그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것은 승자만 있는 ‘윈-윈’ 전쟁, 버려진 공공용지를 골라서 꽃밭으로 만드는 싸움이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이가, 아마도 향기까지, 승자임이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승리의 순간이 언제 올지 알아내기란 쉽지 않다. 늘 모자라면서도 버려지기도 하는 것을 상대로 싸우는 세계적인 규모 의 도전은, 초라한 가로수 보호시설 하나를 바꾸어놓으려고 애쓰는 우리에게는 너무도 멀고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도전의 규모를 줄인다고 해도, 자랑스러운 우리 정원은 아름다운 모습을 오래 간직하지 못한다. 싸움의 결과는 예측할 수 없다. 흥미진진한 기회와 실망스러운 탈선이 되풀이되어 언제든지 행로에서 밀려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원을 음미하면서 유유자적 평화를 말하기란, 열정이 넘치는 사람들에게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은 끝없이 자연과 몸싸움을 벌이기를 좋아 해서 그렇다. 무엇을 위해 싸우든 게릴라에게 싸움이란, 전통적인 대결밖에 모르는 사람보다 그 성격이 더 모호하다. 그런 이유로 게릴라 가드너는 승리란 칼로 자른 듯이 경계가 분명한 것이 아님을 받아 들여야 한다. 경계가 불분명하다면, 식물의 종을 꼼꼼히 따지는 학자처럼 우리도 승리가 도대체 무엇인지 따져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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