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으로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세상에 하였으면 충분하지,
이제 와서 60이 넘어서 글을 가지고 무슨 이야기를 또 하려 하느냐!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하지 못하고 참아가면서 사는 것이
세상살이인데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으냐! -
필자가 생각해도 그렇다.
집 사람도 그렇게 퉁을 준다.
글 쓰는 것을 소년 시절부터 두려워하였다.
글에서는 나의 알리고 싶지 않는 내면세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 쓰면 언제나 독필(毒筆)이다.
그래서 내 업을 음악으로 택하였었다.
음악은 형이상학적 예술이기 때문에 교묘히 내 내면의 세계를 가리 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순(耳順)에 들어서서 다시 글을 쓴다.
성격이 역시 운명이다.
나름대로 몇 개의 주제를 방담(Kt)같이 다루어 보았다.
이 방담들 중에는, 일반적인 기독교의 문제 대한 이야기도 있고,
특정한 성경 해석이야기를 그야말로 횡설수설한 것도 있다.
신학 - 수 천 년을 내려온 학문이다.
수많은 신학자들이 수많은 주제를 다룬 분야다.
방담처럼 늘어놓은 나의 이야기도 이미 신학자들에 의하여 모두 언급된 것일 것이다.
그런데 신학자들의 논문은 시중에 거의 유포되지 않는다.
목회자들도 예배시간에 신학자들의 새로운 사상을 거의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면 내 방담도 이야기를 즐기는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조금은 도움이 되는 이야기가 되리라 필자는 생각한다.
이 책에서 다룬 나의 방담은 그저 논리적으로 성경을 해석할 때 제시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정도의 것이다.
그 방담들을 필자가 필사적으로 주장하거나 그 것을 위하여 목을 맬 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사실 필자에게는 어떠한 교리나 성경의 해석도 절대적인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어떠한 교리나 해석도 절대적인 것으로 믿지는 않는다.
그러한 것이 내 믿음의 중요한 대상도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의 믿음은 아주 간단하다.
영혼의 아버지 하나님과, 중보자 - 예수를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이 외에는 아무 필요한 것이 없다.
인간이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의 전통과 문화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유대교에서 벗어나 기독교를 만들었지만,
예수님과 사도 바울 역시 유대인이다.
그들의 몸에 유대인의 사상과 전통이 몸에 배어있다.
유대인들의 제사에서 가축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나,
또 그것들이 자신의 속죄제이며 화목제라고 믿는 사상이 그 분들에게는
어릴 때부터 온 몸에 배어있는 분들이다.
그들은 죄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고, 유대교의 전통으로 내려온 대속물이나 화목제의 구속사상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신이 인간의 죄를 위한 대속물이며 화목제의 제물이 되셨다는 것을 예수님 자신이나 바울도 쉽게 이해하고 몸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런 전통이나 사상이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없었다.
죄사함을 받기 위하여 성소에서 가축의 피를 뿌리고 그 몸을 불사르는 것이나, 짐승에게 죄를 씌워 광야로 몰아낸다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무척 생소한 사상이다.
따라서 대속이니, 속전이니, 화목제 같은 사상은 우리민족에겐 몸에 배여 있지가 않았다.
필자가 어릴 때 받아들인 타 문화의 이러한 믿음은 나이가 들자 자연스럽게 희석되어져 버렸다.
예수님이 내 죄의 대속자라는 개념은 이제 거의 뇌리에만 있다.
그 의미는 이해하고 있지만 내 몸에 배인 사상이 아니다.
그런 개념은 우리나라 문화와 전통에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사상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기독교의 전래로 우리나라 사람에게 알려진 개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은인(恩人)이라는 개념은 있었다.
예수님은 필자에게 은인 - 구원자이다.
필자는 어려서부터 종교성이 강했다고 생각한다.
영혼과 다음 세상을 믿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였다.
예수를 모르고 필자가 하나님을 알 수 있었을까?
예수를 몰랐다고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렇다고 혼자 스스로 깨달아 독성(獨聖)이 되지도 못 했을 것이다.
예수님을 몰랐다면 하나님을 만나려고 고생께나 하였을 것이다.
끝내 만나지도 못 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고맙다, 그래서 그는 내 은인이고 구원자이다.
그를 통하여 내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죄의식이 인간의 가장 주요한 고통의 근원이라고 주장하지만
모든 사람이나 종교에 해당되는 주장은 아니다,
사람마다 고통의 근원이 다를 수 있고, 어느 종교는 자아 존재 자체가
고통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 필자가 하나님을 왜 믿느냐는 질문이었다.
필자의 신앙의 본질이 궁금하였던 모양이다, 사실 이 문제는 필자의 아들도 궁금해 한다.
답은 그저 단순하다.
하나님은 내 영혼의 아버지시니 그래서 믿는다, 그것뿐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믿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 이유가 있어야 하는가?
하나님은 내 영혼의 아버지시니, 필자는 죽음과 사후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세상에서 언제나 그저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 수 있으니 내 생활이 즐겁다.
내가 즐겁게 사니 내 주위 사람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세상에 살면서 이 정도면 족하지 아니하냐?
필자가 무슨 커다란 일을 할 큰 인물도 아닌데.....
사후의 일은 하나님 일이니 내가 왈가불가 할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 소망을 들어 주신다면 나는 죽는 것으로 내 존재가 사라졌으면 좋겠다.
실제로 나 하나쯤 없어진다고 하나님에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필자를 기독교인이라 부르든 아니든 그것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주위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사는 사람들을 보면 필자는 기분이 좋다.
그들은 축복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도 축복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시샘은 안 한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축복 중의 하나가 필자가 하나님에게서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대로 죄에서만 해방 된 것이 아니다, 자유를 얻은 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하셨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자유를 주셨다.
하나님이 나를 분가(分家)시켰다.
세상에서는, 부모가 자식에게 공부도 시켜주고, 결혼도 시켜주고, 직장도 구해주고,
집도 마련해 주었는데도 분가를 하지 않고 부모와 같이 살려는 자식이 많이 생겼다.
그래서 신조어가 생겼는데 캥거루 세대라고 한다.
그들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부모와 같이 살려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부모에게 얻으려고, 기대고 살려고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늙지 않으셨으니 자식들과 같이 살며 자식들에게 봉양을 받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분가하지 않고 하나님과 같이 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재산이 너무 많으셔서 그러하지 아니 한가 필자는 의심한다.
사람들이 끝없이 하나님께 구한다. 또 주위에서 그렇게 하라는 조언도 많다,
그러나 아마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의 소박한 믿음일 수도 있다.
필자도 아버지 집에서 계속 살고 싶었는데 나가시라 한다,
내가 받은 은혜가 족한 줄 알라는 것이다.
하나님도 부담이 되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고 분가를 시켜주셨다.
자유를 주셨다.
같이 살 때는 조심하느라고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조용조용 살았는데,
이제 필자는 마구 큰 소리로 방담도 한다.
그래서 감사하며 산다.
필자는 하나님이 내 아버지면 그 것으로 그만이다.
예수님이 내 구원자며 은인이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하나님에 대한 신상 정보도 별로 알고 싶지 않다.
예수님의 신상 정보도 나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 아버지가 K. S 출신인가?
우리 아버지가 어느 나라 대통령이셨든가?
우리 아버지가 어느 그룹 회장인가?
만일 그러하다면 이러한 것들이 남에게 자랑거리는 된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들이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는 이유는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성립시키는 것은 이런 조건이 아니다,
단지 핏줄이 같으면 되는 것이다.
자식들이 아버지를 자랑하려는 마음은 이해하나, 때로는 이런 마음이 사치일 뿐이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위대하게 만들려는 마음은 이해하나,
이런 마음이 때로는 인간의 탐욕적인 사치가 되기도 하고, 탐욕적인 사치의 결과이기도 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영광스러운 하나님으로 만들려고 애쓰는데,
하나님 자신은 그러한 일에 관심도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기독교인인가?
나와 아버지의 관계를 다른 사람들에게 묻는다는 것?
어리석은 일이다.
---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