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금요일 오후, 나는 혼자 집에서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안 되는 검사결과서와 씨름하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용어들의 뜻을 찾아보고서야 마침내 내용을 이해했고,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암에 걸렸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 갑자기 구체적인 현실이 되어버린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 그렇게 깊이 생각하자니 기분이 몹시 이상했다.
나는 토요일 오후가 되도록 소파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완전히 비현실적인 상태에 빠져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 일을 어떻게 알려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고, 너무나 슬펐다. 그리고 뭔가 막연하게 치욕스러웠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 ---p.25
‘내 인생에 암이 왜 필요했던 걸까?’
이런 의문을 품는다는 게 이상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질병 따위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고? 하지만 질병에 의미가 없으란 법도 없지 않은가? 우리는 사소한 시련에도 반사적으로 이렇게 내뱉는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 거지?” 인간은 무엇보다도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난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물론 그 의미라는 것은 전적으로 상대적일 수 있으며, 주어진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게 모르게 의미를 추구한다는 점은 어쨌든 변함없는 사실이다. 의미를 찾는 이유는, 의미가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고통은 아무 의미 없는 고통보다는 덜 고통스럽다. 힘든 일과 어려운 시련이 닥쳐도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우리는 받아들이고 견뎌낸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될 것, 그것을 지금 하라, ---p.13
자기가 아프든 다른 사람이 아프든 간에, 오랫동안 병을 겪다 보면 생기는 장점이 있다. ‘절망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안다는 것이다. 게다가 병은 나쁜 일이긴 해도 아주 귀중한 가르침을 준다. 병이 났다면 그건 그동안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임이 틀림없다. 이제 자신에게 관심을 쏟을 때가 되었음을 병이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전 낙관주의자가 아닙니다. 현실주의자죠.”, ---p.36
“야나 씨,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세요. 죽을 거라는 건 알고 있죠? 우리는 지금 당신이 암 때문에 죽을지 안 죽을지를 결정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결정하려는 건 당신이 어떤 방식으로 죽을 건가 하는 거예요. 따님이 둘 있다고 했죠. 딸들에게 전신성 마비로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는 고통을 겪으며 침대에서 죽어가는 엄마에 대한 기억을 남겨주고 싶으세요? 아니면 마지막까지 씩씩하게 잘 살아냈던 여성으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죽을 거라는 건 알고 있죠?”, ---p.295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사람들이 남몰래 울려고 구석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을 수시로 보았다. 고통이 너무 심해 녹초가 된 사람들도 보았다. 환자들은 모두 불안감을 안고 있었고, 그 불안감을 용기와 명랑함으로 바꾸려 애쓰면서 간신히 견디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서로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있었다. 자신 앞에 놓인 시련을 인생을 되돌아보는 기회로 만들 줄 아는 사람들도 많았으며, 의젓하게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시련은 자기가 몰랐던 능력이 스스로 발휘되는 기회라는 것을 그 모든 사람이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몰랐던 능력이 스스로 발휘되는 기회, ---p.67
암에 걸렸을 때 나는 지옥으로 내려간 이난나처럼 생의 충동과 빛과의 교감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것도 당시에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말이다. 그래서 그 교감을 회복했을 때 그토록 강렬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지옥으로 내려간 덕분에 나는 희망도 사랑도 없는 어둠 속에 내버려둔 나 자신의 일부를 만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내 안의 시인, 배우, 음악가가 다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고, 교육자로서뿐만이 아니라 예술가로서도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내 안의 빛을 키워줄 선택, ---p.333
일곱 살이었던 어느 날, 야나는 이웃집에서 빨래를 개고 있었다. 그녀가 예뻐하던 한 살 터울의 여동생과 함께였다. 그런데 동생이 혼자 밖으로 나가서 찻길을 건너다가 그만 트럭에 치이고 말았다. 동생은 그 자리에서 죽었고, 야나는 창밖으로 그 장면을 목격했다. 야나는 그 사고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음에도 평생 자기 때문에 동생이 죽었다고 생각하며 살게 된다. 동생이자 가장 친한 친구를 잃은 사건이었다.
그처럼 비극적인 사건과 그 사건이 유발하는 긴장을 겪었을 때 대부분의 아이들이 보이는 반응대로, 야나는 그때부터 완벽에 집착했다. 자기 잘못을 용서받기 위해 나무랄 데 없는 아이가 되기로 한 것이다.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끊임없이 노력했고, 그로 인해 그녀의 진짜 감정은 억압되었다. 뱀이 목을 조르듯 내면의 자아를 질식시키는 완벽주의에 이른 것이다.
야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가혹한 속세의 삶과는 화해하지 못하며,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고도의 정신수행을 피난처로 삼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이러한 심리기제에 주목한 이유는,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야나가 왜 그렇게까지 병원을 무서워했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야나의 부모님은 어린 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야나를 병원에 맡겼다. 왜 병원에 맡기게 됐는지 자세한 사정까지는 나는 모르지만, 어쨌든 야나는 부모님한테 버림받았다고 느끼며 몹시 힘들어 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생긴 병원 공포증이 평생 지속된 것이다.
우리는 성장한 후에도 유년기의 체험을 반복하면서 살아간다. 그 체험이 우리를 가두고 우리를 힘들게 만든다. 나는 정신분석가로서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야나의 경우를 통해 그 반복이 어디까지 계속될 수 있는지 실감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 시련에 부딪히면 이런 질문을 던져보는 게 좋다. ‘나는 지금 어떤 체험을 반복하는 중인가? 내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울지 못했던 일은 무엇인가?’
우리 중에는 결핍의 상처와 관련된 체험을 평생 되풀이하는 사람도 있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의 비극을 되풀이하는 사람도 있으며, 부富를 둘러싼 갈등을 되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프로이트는 개인이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준 사건을 극복하고 초월하는 게 얼마나 어려울 수 있는지 지적하면서 ‘강박적 반복’이라는 용어까지 만들어냈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 ---p.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