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 만년의 노작(勞作)이자 독일 교양소설과 시대소설의 고전으로 꼽히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가 민음사에서 번역돼 나왔다. 괴테 탄생 250주년을 맞은 올 한 해 동안 민음사는 <세계문학전집>을 통해 {이피게니에·스텔라} 등을 비롯한 괴테의 작품을 꾸준히 소개한 바 있다. 이번 {편력시대}는 괴테 탄생일인 8월 28일을 기념해 출간된 것이다. 특히 1, 2권으로 나누어 출간된 민음사의 {편력시대}는 1993년부터 괴테 읽기에 정진해 온 독회 그룹 <괴테 시대의 문학> 회원 17명이 공동으로 번역해 출간했다는 점에서 번역계에 신선한 활기를 불어넣을 듯하다.
독회 그룹 <괴테 시대의 문학>은 괴테 문학의 올바른 수용과 본격적인 연구 풍토 정착이라는 모토를 내걸고 1993년에 결성되었다. 회원은 독문학계의 원로에서부터 박사과정을 마친 소장 학자까지 모두 17명으로 구성돼 있다. 독회 회원인 안삼환 교수(서울대 독문학)는, 이번 번역은 각 분야를 분담해 토의·정리하는 기존 공동 연구의 수준을 넘어 연령과 학연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롭고 진지한 대화를 통한 성과물이라고 이번 번역의 의의를 소개했다.
공동 번역 자체가 한국 번역계에 흔치 않은 일일뿐더러, 근 5년이라는 기간을 가지고 17명이 토론을 주고 받으며 번역했다는 점에서 신선한 시도였다고 평가할 만하다. 또한 공동 작업인 만큼 한 사람이 매달려 번역했을 때의 오류를 수정할 기회가 많았고, 번역 후에 대표 필자(김숙희 동덕여대 교수)가 마무리해 전체적으 깔끔하고 정확한 번역을 선보이고 있다.
{빌헬름 마이스트의 편력시대}는 괴테 만년의 노작이다. 괴테는 이 작품을 1807년에(52세) 쓰기 시작하여 14년 후인 1821년에 1판을 완성하여 출간했고, 바로 개정 작업에 들어가 운명하기 3년 전인 1829년에서야 최종판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니까 무려 22년 정도의 집필 기간이 소요된 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발표될 당시의 독자들은 이 작품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줄거리 중간중간에 액자 소설 형태로 끼여든 [노벨레]들과 잠언들이 기존의 형식을 해체하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구체제의 붕괴와 기계의 시대로 접어든 사회를 묘사한 것이 독자들의 이해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처럼 이 작품의 내용과 형식은 혁신적이었으며, 그 점에서 {파우스트}와 함께 괴테 문학의 한 대척점을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의 전편 격인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빌헬름은 시민사회 내에서 연극(예술)을 통해 자신을 해방시키고자 노력하는 자였다. 그러나 혁명을 거치고 구체체의 몰락을 경험한 빌헬름의 눈에 비친 세계는 시민사회의 문제를 뛰어넘어 새로운 국면의 조짐을 보여주고 있었다. {편력시대}는 알프스 산악지대를 편력하는 빌헬름을 통해 당시 사회의 변모 양상을 보여준다. 기계의 도입과 전통적인 가내 수공업의 몰락, 그에 따른 실업자의 배출이라는 사회 현상은 이 소설의 중요한 모티프가 된다. 괴테는 편력자 빌헬름을 통해 몰락한 사회의 실상과 이 몰락을 타개해 보려는 당대의 인물들을 보여준다. 방적·방직 기술을 익히는 레나르도, 광산업에 몰두하는 몬탄 등은 새로운 사회 관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며, 이들의 사상을 통해 <기술력>과 새로운 세계(신대륙)로의 이주가 대안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 소설에서 산업 대중으로 몰락해 버린 사람들에게 괴테가 역설하는 바는 <체념>이다. 이 책의 부제가―체념하는 사람들―보여주듯이 노년의 괴테는 <체념>이란 생각에 깊이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체념이란 무기력한 포기 같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소설에서 체념이란 영웅적이었던 한 시대가 저물었다는 것이며, 그리하여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참여해야 한다는 도덕적인 의식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이 소설에서 더 이상 영웅적인 주인공은 없다. 빌헬름은 단지 인간과 인간 사이를 떠돌면서 그들의 생각을 전달하는 매개자로서 주인공일 뿐이다. 체념을 통해, 그리고 보다 큰 조직을 위해 자신을 제한할 줄 아는 미덕을 통해 이 작품은 한 개인의 소설이 아닌, 위대한 공동체의 소설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