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무」
마르틴과 티티, 오토바이를 탄 두 소녀가 시내 한복판의 작은 광장 근처에서 만난다. 티티와 그의 남자친구는 먼저 와 담배를 피우며 기다리고 있다. 마르틴은 점심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막상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심장이 아주 세차게 뛴다. 하지만 자신을 괴롭히는 일당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는 티티의 제안을 떠올리고, 오토바이를 출발시킨다. 이 일을 해내면 마르틴은 더이상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마르틴은 눈을 감는다. 그리고 그 잔인한 하루 중 그 몇 초 동안의 붉은 밤을 음미한다. 다시 눈을 뜨고 눈앞을 바라보니, 햇살 아래 녹아내리는 넓고 검은 아스팔트 강처럼 보이는 길은 아까보다 훨씬 더 한산하고 더 하얗다. 마르틴은 좀전처럼 두려움이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도록 입술을 꽉 깨문다. 타인들, 쳐다보는 사람들, 자기집 덧문 너머나 버스 뒤에 매복해 있는 사람들, 그녀는 그들이 너무너무 싫어서 입술이 다시 떨리기 시작하고, 심장이 거칠게 방망이질친다. 그 모든 감정들이 아주 빠르게 밀려왔다 밀려가서, 마르틴은 과음하고 담배를 많이 피운 것처럼 취기가 오르면서 어지럽다. 그녀는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쳐다보는 사람들, 커튼 뒤나 버스 뒤에 숨어 있는 그 비열한 사람들의 얼굴을 다시 곁눈질한다. (17쪽)
두 소녀가 계획한 일은 길가에 서 있는 행인의 주위를 오토바이를 타고 빙글빙글 돌며 날치기하는 것, 즉 ‘원무’다. 티티와 마르틴은 조용하고 아득한 도로 위를 오토바이로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가로지른다. 이윽고 두 사람은 인도 가장자리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파란 정장을 입은 여인 주변을 돌기 시작한다. 여인이 들고 있는 검은 가죽 핸드백의 금빛 잠금쇠가 번쩍인다.
마르틴은 자기 내면에 무엇이 있는지, 무엇이 자신을 혼란에 빠뜨리는지, 무엇이 이토록 자신을 불안하게 하는 동시에 화나게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이곳의 햇빛이 너무 강렬해서일까? 여인의 얼굴을 달아오르게 하고, 그녀의 살갗에 땀이 맺히게 하고, 핸드백의 금빛 잠금쇠가 날카로운 햇살에 번쩍거리게 만드는 잔인하고 가혹한 햇빛이 너무 강렬해서 그런 게 아닐까? (19~20쪽)
이내 원무는 끝이 난다. 텅 빈 거리에 고통과 경악의 비명이 울려퍼진다. 마르틴이 그 일에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두 소녀가 거리를 돌며 원무를 하게 만든 현실이 처음부터 비극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장에 닥친 운명은 너무 갑작스럽고, 잔인하다. “강렬한, 참을 수 없는 거대한 진공”이 마르틴을 잠식하는 동안, “핸드백의 금빛 잠금쇠가 살인적으로 번쩍이는 빛의 파편들”을 그의 눈에 던진다.
「멋진 인생」
양어머니에게 각각 입양된 두 친구 푸스와 푸시는 거의 쌍둥이라고 할 만큼 서로 닮았다. 진짜 이름도 알파벳 하나만 다를 뿐 발음도 같고, 두 사람 다 작은 키에 검은 눈, 깡마른 몸, 방울소리 같은 웃음소리까지 비슷하다. 그들은 어디든 함께 붙어다니고, 열여섯 살에 함께 퇴학을 당한 이후로 같은 봉제 공장에서 일한다. 공장에 들어갔다가 사고를 치고 한두 달 만에 그만두기를 밥먹듯 했지만, 지금은 바지에 주머니를 달고 단춧구멍을 만드는 일을 하루에 여덟 시간씩 일주일에 닷새 동안 한다.
두 어린 소녀는 감옥 같은 공장에 얽힌 일들을 잊기 위해 처음엔 게임처럼 ‘멋진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인도, 발리, 캘리포니아, 아마존, 카사블랑카, 아니면 뉴욕, 로마, 뮌헨 등의 대도시로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들. 그러다 이야기는 점점 구체화되고 정말 떠나야 할 것처럼 진지하게 변해갔다. 그러다 두 사람은 차가운 가랑비가 내리는 3월 어느 날 뚜렷한 계획 없이 문득 떠난다.
푸스와 푸시는 오로지 그 생각만 했다. 계속 참고 기다리기만 한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어질 것이었다. 늙고, 아주 신경질적으로 변하고, 어쨌든 절대로 돈을 벌지 못할 터였다. 사장 로시가 그들을 해고하지 않는다 해도 그들 스스로 앞으로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1쪽)
그들은 로마나 베네치아에 가고 싶었지만, 돈이 모자라 몬테카를로행 기차표를 한 장만 산다. 기차표를 사는 데만 이미 저금한 돈 대부분을 써버렸다. 하지만 둘이 꼭 닮은 외모를 이용해 무사히 몬테카를로에 도착하고, 바다가 보이는 근사한 호텔에 들어간다. 샴페인, 뜨거운 물로 하는 샤워, 알싸한 비누향, 하얗고 보송보송한 타월에 잠시 행복하다. 게다가 생선, 갑각류, 과일, 케이크 등의 갖가지 룸서비스…… 하지만 그들에게 돈이 충분할 리 없다. 그들은 호텔이나 식당에서도 마찬가지로 돈을 지불하지 않고 몰래 도망 나오는 방식으로 근근이 여행을 이어간다.
크고 작은 ‘범죄’를 일삼고, 히치하이크하며 가까스로 이탈리아에 도착하지만, 그들의 여행은 공장 밖에서 꿈꾸던 모험과는 달라져간다. 돈도 금세 떨어지고, 체력도 바닥난다. 둘의 편법에 쉽게 속아넘어가주던 사람들도 점점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그들의 모험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리라는 건 처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현실에서 뜻밖의 요행이 그렇게 쉽게 찾아올 리 없다. 하지만 이 모험을 끝내고 싶어도 이제는 돌아갈 수 없다. 그들의 모험이 유독 안타깝고 위태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때로 막연히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기도 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그저 시간만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다시 멀리 떠날 시간, 이번에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기 위해 다시 떠날 시간만을. (2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