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경제는 탐욕과 두려움의 상호작용으로 움직인다. 탐욕이 두려움을 압도하는 현상은 한 세대마다 최소 한 번씩 발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때 비이성적 거품이 생겨난다. 그 중심추가 두려움 쪽으로 다시 쏠리면 거품이 꺼지고 시장이 폭락한다. 역사적으로는 적어도 17세기까지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튤립 광풍(Tulip Mania)’의 사례가 있다. 당시 네덜란드의 부유한 상인들은 평생 모은 재산을 튤립 구근 하나에 모조리 쏟아 붓기도 했다. 이후 투자자들이 신세계 탐험 자금을 조달하고자 기를 쓰고 매달리는 동안 영국에서는 남해 버블(South Sea Bubble, 1720년 봄부터 가을에 걸쳐 발생한 투기 과열 열풍)이, 프랑스에서는 미시시피 버블(Mississippi Bubble, 18세기 초반 프랑스가 세운 미시시피 강 주변의 개발 계획을 둘러싼 투기 사건)이 발생했다. 더 나중에는 운하들에 거품이 끼었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미국 철도 주식들에 거품이 형성되었다. 1920년대에도 자동차 관련 신기술에 이끌려 미국 주식에 버블이 발생했다. 그러나 지난 몇 십 년간 거품 발생의 빈도는 증가하는 추세다. 1980년 금에 거품이 형성되었다 꺼졌고, 1982년과 1994년 멕시코를 위시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부채도 똑같은 운명에 처했다. 일본 주식들은 1990년 정점을 찍은 뒤에 무너져 내렸고, 그 직후 스칸디나비아의 은행주들도 똑같은 일을 당했다. 아시아 ‘호랑이들’의 주식들은 1997년에 과열에서 벗어나 현실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인터넷 버블은 2000년의 닷컴 붕괴와 더불어 사그라졌다. ---p.인간의 탐욕이 버블을 키워냈다
금융의 혁신적 돌파구들은 한때 전문가들만 접근이 가능했던 자산들을 세계 어느 곳의 투자자들이든 마우스 클릭 한 번으로 순식간에 사거나 팔 수 있는 대상으로 변모시켰다. 신흥시장 주식들과 각국의 통화, 신용 및 상품들은 한때 단단한 벽으로 분리된 공간 내에서 움직였고 그 나름의 규칙을 따랐다. 이제 그것들은 모두 상호거래 가능한 금융자산이 되었고, 자금의 대량 유입으로 그 시장들이 확대되자 다수의 위험한 자산들이 동시에 거품을 형성하면서 일제히 치솟았다. 그 사이 이런 여러 영역들에서 전문적으로 활동하던 은행들은 시장에게 자신의 역할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은행들은 빼앗긴 영역에서 발을 빼기보다는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나섰고, 투기성 짙은 과도한 활동에 차츰 더 매료되었다. 이 같은 유독한 요인들이 한데 결합해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시장이 악명 높은 쓰레기로 전락하는 여건을 창출했다. 금융기관은 상환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대출을 확대했고, 그 대출을 재포장해 널리 확산시켰다. 이런 지나친 포장작업으로 인해 향후 그 대출이 부도가 나기 시작했을 때 손실을 떠안게 될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이는 미국 금융시스템과 -상호연계된 시장들 탓에- 글로벌 금융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렸다. 플로리다에서 성행한 부실 대출 관행은 전 세계를 동시에 끌어내렸다. ---p.시장의 상승과 은행의 추락
한때 금은 세계 금융시스템을 굳건히 고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고정된 것이 풀리고 나자 자본주의 세계는 호조세를 되찾기 전까지 10년간 ‘스태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그 새로운 시스템의 핵심 요소는 통화의 가치가 중앙은행들의 신뢰도에 좌우된다는 점과 국제무역의 거래조건을 약정하는 환율이 정부가 아닌 시장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 그리고 유가가 그 시스템을 정박시키는 닻으로서 금값을 대체했다는 점이다. 1971년 전까지 자본주의 세계는 1944년 뉴햄프셔 주 브레튼우즈 리조트에서 연합국이 개최한 정상회담의 결과를 따랐다. 그들은 오랜 기간 존속해온 시스템으로 회귀했다. 그 시스템 하에서 유통되는 지폐는 일정량의 금으로 태환될 수 있었다. 금은 희소한 자원이기 때문에, 그 체제는 정부들이 발행할 수 있는 통화량에 엄격한 제한을 가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 속에서 독일이 전쟁부채를 갚기 위해 돈을 마구 찍어내는 바람에 하이퍼인플레이션에 빠져든 사건은 연합국 리더들에게 과거 체제로의 회귀가 필수적인 조치라는 점을 시사했다. ---p.금본위제에서 석유본위제로의 변화
일본은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으로 새해를 축하하곤 한다. 1980년대를 마감하는 날 밤, 교향곡 제9번 마지막 악장인 ‘환희의 송가’는 당시의 상황과 꽤 부합되는 듯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고 동구권 전역에서 공산주의가 무너졌으며, 이는 즉각 자본주의 세계에게 새로운 신흥시장의 방대한 영역을 열어주었다. 그로부터 몇 달 전에는 중국에서 발발한 학생 시위가 천안문광장 대학살로 끝이 났다. 이 사건으로 인해 중국 최고지도자 덩샤오핑은 국민에게 새로운 무언가를 약속해야 할 입장에 놓였다. 중국 정부는 민주주의를 제약하는 대가로 경제성장을 보장하기로 했다. 중국은 무자비한 자본주의를 통해 성장을 달성할 예정이었고, 1990년에 1947년 공산주의 반란 이래 폐쇄되었던 상하이증권거래소를 다시 개장했다. 이 사건들은 자본주의의 면면을 바꿔놓았다. 하지만 훨씬 엄청난 충격을 가했던 것은 일본이었다. 1989년 12월 말 일본 주식시장은 버블의 절정에 이르렀다. 이 버블이 터질 경우 발생할 부의 손실에 따른 국제적 영향은, 1929년 월스트리트 대공황에 이어 발생한 금융위기 및 경기침체와 맞먹을 정도로 심각할 소지가 다분했다. 일본은 그 위기에 맞서 맹렬히 저항했고, 이 과정에서 일본의 통화는 세계 다른 국가들을 위한 저렴한 자금의 원천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발생한 이른바 ‘엔 캐리트레이드(yen carry trade)’는 결국 전 세계를 넘나드는 자산에 버블이 형성되도록 만들었다.---p.엔 캐리트레이드
이 사건은 영국 정치사에 ‘검은 수요일(Black Wednesday)’로 기록되었고, 당시 집권당이었던 보수당은 이를 계기로 10년이 넘도록 야당 신세를 면치 못했다. 정확한 내막을 알 수 없었던 글로벌 투자자들은 서둘러 진상 파악에 나섰다. 그달 후반 런던의 〈더 타임스(The Times)〉는 국제적 투자 거물인 조지 소로스(George Soros)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소로스가 털어놓은 바에 따르면, 그의 펀드는 파운드화 하락을 이용해 9억 5,0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고, 유럽 환율조정체제를 중심으로 발생한 혼란을 틈타 다른 통화들에 투자해 추가로 그 정도의 돈을 더 벌어들였다. 당시의 경제 상황을 면밀히 관찰한 소로스는 영국이 유럽 환율조정체제 내에서 독일 마르크 대비 파운드의 가치를 지켜낼 수 없으리라는 판단을 내렸다. 영국 경제는 불황에 빠져 있었고, 독일 정부가 금리를 낮춰 영국을 도와줄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또한 파운드화에 불리한 약간의 움직임만으로도 압도적 힘을 발휘할 것이며, 따라서 그의 투자 움직임이 자기실현적인 예언이 되리라는 판단을 내렸다.---p. 외환시장
경제학자들이 경제성장의 한 방식을 일컬어 사용하는 표현인 ‘대안정화’는 1980년대 초 폴 볼커의 인플레이션 통제 이후 시장의 변동성이 훨씬 덜해지면서 도래했다. 간간히 경기침체가 발생하기는 했으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정도가 그다지 심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경제적 대안정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시장들은 다른 시기와 만만치 않게 변동적이었다-시장들의 일간 움직임은 경기보다는 대중의 심리를 더 많이 반영하므로 당연한 일이다. 그 이후 신용 붐이 대단히 강력해졌고, 많은 이들이 안정기의 이점을 한껏 누렸다. 변동성이나 두려움은 옵션가격을 이용해 측정할 수 있다. 시카고 옵션거래소(Chicago Borad Options Exchange)의 빅스지수(Vix Index)는 옵션을 통해 주식시장의 향후 변동성에 대비하는 비용을 추적한다. 더 많은 투자자들이 미래 변동성에 대비해 방어 준비를 갖출수록 빅스는 더 높아진다-그래서 이 지수의 별칭이 ‘공포지수’다. LTCM 위기를 겪는 동안 빅스지수는 45를 상회하며 최고치를 기록했다. 시장들이 안정적일 때도 사이사이에 끼어드는 짧은 경기 발작 탓에 일반적으로 변동성 자체도 변동적이다.---p.대 안정화 시대의 종식
그 사건은 영국의 금융규제와 노동당 정부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렸다. 여기에도 분명 군집 역학이 작동하고 있었다. 즉 신뢰가 차츰 줄어든 이후 군집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신뢰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셈이다. 이에 대한 대처로 영국은 노던록 계좌에 대한 보험금을 무제한으로 인상했는데, 이는 곧 그 은행의 예금자들이 영국 정부에 돈을 빌려준 것으로 여길 수도 있음을 의미했다. 이후 노던록은 정부에 인수되었고 그 은행을 매수하려는 대상이 나서지 않자 국유화되었다. 이것은 대공황 이래 선진국에서 발생한 최대 규모의 뱅크런이었다. 예금보험이 은행에 저축해둔 돈을 날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없애준 덕분에 뱅크런은 한낱 과거의 일이 되어 있었다-추가적인 예금보험으로 노던록 예금인출 사태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듯이 말이다. 예금보험의 도입은 은행들의 부실대출 관행을 막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노던록 사태 이전까지는 갑자기 예금을 날려버리는 일로부터 예금자를 보호했고 금융시스템을 보다 안전하게 만들어주었다. 그 대신 은행이 지불하는 보험료와 그들이 받는 철저한 감사는 성장을 제한하는 경향이 있었다. 1930년대에나 오늘날에나 이 거래는 훌륭해 보이지만, 그 개념은 비난의 여지가 있었다. ---p.뱅크런
이로써 독일과 프랑스는 진퇴양난에 빠져들었다. 기존의 토대 위에서는 유로존이 살아남을 수 없을 터였다. 취약한 회원국들을 탈퇴시키고 유로존의 규모를 축소하거나, 원칙을 수정해서 각국 재무부가 다른 모든 것들을 앞세우고 최후방으로 물러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형편이었다-이는 공동의 재정정책과 아마도 공동의 ?무부 그리고 주권의 상실을 함축하는 움직임이다. 또한 독일 국민이 다른 국가들의 부채를 모조리 대신 갚아주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독일 유권자들은 당연히 이에 반대했다. 대략적인 절충안도 있었다. 연이은 긴급 정상회의에서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과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스 사르코지는, 재정통합을 좀 더 긴밀히 다지고 목표 재정적자를 초과한 국가들에게 페널티를 적용할 계획을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을 기울였다. 더불어 신규 자금 발행을 통해 유럽중앙은행도 구제작업에 동참해주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내비쳤다. 그러는 내내 세계 시장은 얼어붙었다. 불확실성과 강도 높은 긴축정책이 동시에 작용해 유럽의 침체가 확실시 되었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형태의 두 가지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p.유로존의 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