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어 성경에는 소돔이 “사악”(邪惡)과 같은 뜻으로 언급된 본문이 여럿 있다. 그러나 소돔의 죄악이 동성애라고 언급된 곳은 성경 안에 단 한 군데도 없다. 소돔의 죄악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교만과 우상숭배, 포식과 번영 속에서 사회적 약자에게 손을 내밀지 않은 태만함과 냉정함 그리고 정의를 타락시킨 것에 있다(신 32:32, 37, 38; 겔 16:49-50; 사 1:10, 1:17; 렘 23:14; 암 4:1, 11).
그러나 소돔 이야기를 토대로 교회가 실천해온 것은 어떤 것일까? 동성애자들을 비롯한 성소수자들에 대해 가혹한 외부인 공포증을 표현하며, 환대가 결여된 교만한 태도로 대한 것은 다름 아닌 기독교였다. 하나님의 노여움,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에 의해 멸망한 소돔의 진정한 죄, 이 심각한 불의와 죄를 오늘도 반복하고 있는 곳이 바로 교회이며, 교회의 교만한 모습 속에 심각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는 딸의 성(性)과 삶에 대해 완전한 결정권을 갖고 있고, 낯선 손님인 남자들의 안전을 위해 두 딸의 몸과 생명을 교환 조건으로 내놓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회와 문화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사회와 문화에 대해서 전혀 아무런 비판도 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결단으로 손님을 받아들여 집주인의 의무를 다한 다음, 롯은 손님의 안전을 위해 교환 조건으로 자기 자신을 내놓기보다 딸들을 희생시키는 쪽을 택하고 있다. 이처럼 가부장적인 롯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 불린다. 또한 성경은 롯의 딸들이 자기들의 자손을 남길 환경이 아니라는 판단이 섰을 때, 아버지와의 성행위를 통해서 자식을 얻으려고 결심하고 실천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행위는, 롯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상태에서 행해졌다는 설명을 통해, 롯은 완전히 면죄되고 있다. 롯과는 대조적으로 딸들은 아버지로부터 내버려져 폭도들에게 치욕을 당하고 죽을지도 모르는 위기일발의 순간을 넘긴 다음에는 성경에서 금하고 있는 “근친상간의 죄”(레 18:17, 20:14)를 추궁 당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다리를 건너야만 하는 입장에 놓여 있다. 완전한 가부장제적 견해다.
성경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해야 한다고 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경을 입맛에 맞춰서 선택적으로 골라가며 읽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성경에는 여러 민족을 차례로 죽이는 보복이나 전쟁에 대해 장려하는 말이 여러 차례 나온다(예: 민 21:1-3, 31-35). 이런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또한 성경에는 일부다처제와 매춘, 노예제도를 그 이유를 묻지 않은 채 받아들이는 반면, 강간을 당한 피해자까지 사형죄로 심판하는 경우도 있다(예: 레 20:10, 20:12, 20:17-18). 그러나 과연 이것을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또한 성경은 남편이 죽으면 그 아내는 남편의 형제와 결혼해야 하는 수혼법(嫂婚法, Levite Law)을 정하고 있으며, 신약성경에서 예수는 이것을 부정하지도 비판하지도 않는다(막 12:18-27). 그러나 현대의 기독교인 중에 이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이것에 비해 성행위 대상에는 두 본문에서 ‘이슈’(issh, 남성, man)가 아닌 ‘자칼’(zakhar, 남자, male)로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즉 “남성이 남성과 자는 것”이나 “남자가 남자와 자는 것”이 아닌, “남성이 남자와 자는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메소포타미아 법령 본문과 비교해 보면 명확해질 것이다. 고대 중기 앗시리아법(MAL=Middle Assyrian Laws)에서는 “남성”이 동등한 신분에 있는 “남성”을 상대로 하는 성행위만 금지하고 있으며, 신분이 낮은 “남자”와의 성행위는 금지하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하면 자유인 신분에 있는 가부장 “남성”은 동등한 신분의 “남성”을 상대로 성행위를 함으로써 상대 남성에게 여자 역할을 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혹시나 그러한 성행위가 행해졌을 때에는 능동적인 “행위자”로 성행위를 주도한 “남성”은 그 벌로 강간을 당한 뒤, 거세(去勢)되어 “내시”(inikkus)가 된다(MAL A20).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다음에 이어지는 예수의 말씀이다. “너희들도 들은 것처럼 옛 사람은 …라고 명한다 그러나 나는 이르노라…”라고 예수는 그것을 다섯 번이나 거듭해서 말하고 있다(마태 5:21-22, 27-28, 33-34, 38-39, 43-44). 옛 사람의 계명에 대한 가르침을 마치 자신의 시대 상황 속에서 새롭게 해석해서 하시는 말씀처럼 말이다.
그리스 로마시대에는 소년애의 상대는 압도적으로 노예 소년이었다. 로마에서는 남자 매춘부를 얻는 일이 쉬웠다고 한다. ‘페타고기아’라고 불리는 학교도 있어 대부분의 학생이 노예 소년이었으며, 실제로 학생들은 소년애 상대가 되기 위해 필요한 교육을 받았고, “귀엽다”라든가 “맛있다”라는 말로 표현되어졌다.
이러한 사회문화적 배경을 고려해 볼 때, 바울은 당시 넓게 행해지고 있던 소년애를 자제심이 결여된 불손한 남자들이 노예와 가난한 소년을 성적으로 이용하는 경제적 착취이며 폭력적 행위라고 지적한 것이다.
또한 7장에서 바울은 믿는 자들에게 자기처럼 독신생활하기를 권면하면서 같은 선택을 한 여자들에 대해서는 남자가 그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 하면 여자는 결단을 포기하고 타협하라고 권고한다. 또한 이혼을 원하는 여자에 대해서는 그 결정권을 불신앙적인 남편에게 줘서 타협하도록 권하고 있다. 이처럼 바울이 주장하는 공동체의 일치는 결국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권위를 갖고 있는 남자들을 위해 약자에게 자기희생을 강요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다. 이런 일치는 엘리트 남자 중심의 가부장제적인 젠더 계층성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일치”일 뿐이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지배적 엘리트 남자들의 문헌에 의하면 자연적인(천부적인, 올바른) 성행위 개념에서 핵심이 되는 중요한 것은 열정이 제어되고 무관심하며 자제적인 “사용”이다. 그리고 가부장적이며 이원론적인 “남자-상위-행위-지배”에 대해 “여자-하위-수용-예속”의 관계로 행해진다. 이렇게 해서 “행위자”인 남자가 정열이나 관심을 갖지 않고 이성적으로 자제력을 갖고 소유물을 활용하며 즐기기 위해서 자신의 소유물인 남녀를 “사용”하는 것이 “자연적인 성행위”인 것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