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목소리로 기록된 생의 비망록, 8년 만의 신작 창작집
치열한 사회의식을 작품 속에 담아내며 80년대 참여 문학의 중심에 서 있었던 작가 윤정모의 창작집 <딴 나라 여인>이 도서출판 열림원에서 출간되었다. 1991년에 출간한 <빛>이후 8년 만에 발표하는 이 창작집은 90년대를 마감하는 윤정모 소설의 현재와 미래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기록물이다.
윤락 여성의 고통스러운 삶을 사실적으로 기록한《고삐》와 독일에서 비운의 삶을 마친 천재음악가 윤이상의 삶을 다룬《나비의 꿈》 등의 여러 작품을 통해 윤정모는 여성 문제, 분단 현실, 농촌 문제, 노동 문제 등의 사회 현실에 천착해왔다. 그에 비해 창작집《딴 나라 여인》은 기존의 공격적인 글쓰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창작 방식을 선보이고 있다. 작가는 기존의 소설 주제들을 다루면서도 좀더 세밀화된 일상사의 영역으로 시선을 옮겨간다. '기존의 내 틀이나 의도를 벗어나 여태 내가 만나온 사람들, 그들의 생각이나 살아가는 모습들을 그대로 한번 옮겨보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처럼《딴 나라 여인》에는 유학생 혹은 해외 입양아가 겪는 정신적 고뇌(<누가 열매를 따는가> <탱고> <재회 연습>)나 여성적 체험의 질곡(<볼록거울> <열꽃> <딴 나라 여인>), 현대 일상에 대한 세태 비판, 혹은 한 인간의 일대기를 통한 역사의 추찰(<24시간 편의점> <덫에 걸린 인생들>) 등 다양한 이들의 삶이 담겨 있다.
현실을 비판하고 선명한 대안을 제시하던 기존의 주인공들과는 달리《딴 나라 여인》의 주인공들은 현실에 뿌리 내리지 못한 채 떠도는 '유랑민의 삶'을 살며, 원죄처럼 떨칠 수 없는 '가족 관계' 아래 놓여 있다. 또한 그들은 전망 없는 현실에 대한 불안감과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IMF로 인해 더이상 부모님의 학비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된 한 영국 유학생의 내적인 방황을 그린 <누가 열매를 따는가>와, 양모와 친모 사이에서 정체성의 분열을 일으키는 해외 입양아의 정신적 고통을 그린 <탱고>, 학생운동에 앞장서다 감옥에 수감되었던 9년 전의 애인이 보낸 편지를 받고 그와의 재회를 고민하는 독일 유학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재회 연습>, 서로 다른 삶에 속해 있는 두 인물의 일상을 교차 서술하는 방식을 통해 현대적 일상의 단면을 끄집어낸 <24시간 편의점>, 윤락 여성의 생활을 계속하며 힘겹게 동생을 공부시켜온 누나가 엘리트 계층이 된 동생부부에게 모욕과 멸시를 받고 급기야 조카의 유괴범으로 몰리게 된다는 <딴 나라 여인>, 성폭행당한 딸과 어머니의 갈등과 화해를 그린 <볼록거울>, 그리고 육십 나이에 젊은 여자를 사랑하게 된 남편과, 연민과 혐오의 시선으로 그를 대하는 아내의 모습을 통해 차분한 어조로 노년 여성의 자기 성찰을 유도한 <열꽃>과 한 칠순 노인의 파란만장한 인생 유전을 한국 사회의 산업화과정과 연결시키면서 가족의 인연을 버릴 수 없는 인생사의 아이러니를 그린 <덫에 걸린 인생들>에서 작가는 전망이 불투명한 현실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외로운 내면과 일상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낮은 목소리로 기록된 생의 비망록이라 할 만한《딴 나라 여인》은 세월이 흐르며 작가 윤정모가 체득한 생의 비의를 가감없이 진솔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집이다. 현재 영국에서 집필에 전념하고 있는 윤정모는《딴 나라 여인》의 출간을 맞아 귀국하여 9월 13일부터 18일까지 한국에 머물 예정이다.
여전히 너무 뜨거운 그녀
--- 99/10/13 김선희(rosak@hanmail.net)
작가 '윤정모'가 실로 오랜만에 신작을 내놓았다. 일부 평론들은 이제 많이 삭혀졌다고 그의 작품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적어도 내가 볼 때 그녀는 여전히 너무 뜨거운 것 같다. 분명한 것을 좋아하고, 꼭 드러내서 보여주고 싶은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있음이 신작 구석구석에 잘 배어 있다. 올 해 나이 쉰 넷, 조로함이 익숙한 우리 문단에서는 이제 붓을 접고 후배양성이나 하겠다고 나서도 사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텐데 작가의 그 정열은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문득, 오래 전 그의 <고삐>가 생각났다. 작가로써 윤락녀의 일생을 쓴다는 것은 웬만해서 통속소설이라는 불명예를 벗어나기 힘든 일이므로 많이 조심스러울 것이다. 당연히 그 작품은 당시 문단에서 철저히 외면당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대중작가'라는 꼬리표도 달고 다녀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로써 그의 작품의 잘 읽히는 미덕에 고개를 돌릴 수는 없다. 잘 알지 못했던 음지 세계속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를 따라가다 보면 문학이 삼가해야 할 군더더기 투성이라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의 이 창작집 <딴나라 여인> 역시 잘 읽히는 미덕을 잃지 않고 있다. 소설을 읽는 맛 또한 상당하다. 작품집 속, 여덟 편의 단편 속에서도 그의 늙을 줄 모르는 장인과도 같은 작가정신 또한 아직 싱싱하게 살아 있음을 여실히 볼 수가 있다. 그의 사람에 대한 부단한 사랑, 사랑하기에 어쩔 수 없이 보이는 인간의 문제, 그 실체를 냉철하게 바라보는 작가적 시선이 압권이다. 다음은 그의 소설에서 인용한 부분이다.
'우리의 생명원리는 순환법칙에 있다. 한데 현대문명은 암처럼 지구를 잠식해가고 그로 인해 어머니 대지마저 심한 순환장애에 걸려 고통으로 헐떡이고 있다. 이제 하루 빨리 순환법칙을 되찾지 않으면 우리의 장래는……. ' 이 말은 참으로 생생하다.
물론 <볼록거울>, <딴나라 여인>, <열꽃>, <덫에 걸린 인생들> 속에서 보여준 여자들의 삶은 다분히 극단적인 사건의 전개라는 단점도 있다. 그렇지만 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공감할만한 것들이다. 책 말미에 붙어있는 문학평론가 '백지연'의 꼼꼼한 서평도 놓치지 말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