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닌 어디 가셨는데?”
“살아 있는 동안 둘이 싸우는 소리만 듣고 자랐다. 야, 그렇게 부모가 싸우는데도 나처럼 착하게 크는 아들이 어디 있냐? 근데 씨발, 이번엔 진짜야. 지난 1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 줄 아냐? 아빠한테 젊은 여자가 생겼고, 엄마는 이혼 서류 던져놓고 집을 나가버렸고……. 전화번호도 바꾸고……. 아빤 또 냉큼 서류 제출하고, 이혼하고, 또 결혼하고. 아 씨발, 뭐가 이리 간단하고, 뭐가 이리 쉽냐.”
제현이 술병을 들자 현제가 불쑥 잔을 내밀었다.
“나도 줘.”
“까불지 마. 너 술 안 마셔봤잖아.”
“그러니까 오늘 한번 마셔보려고.” --- p.46~47
인기척이 났는지 복도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현제가 허억 하고 비명을 질렀다. 복도 창에서 검은 물체가 교실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냉장고 속인 것처럼 교실에 찬 기운이 돌았다. 턱이 고장 난 인형처럼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보고 있는데도 검은 실루엣은 움직임이 없었다. 핸드폰 플래시를 켠 제현이 벌떡 일어나 교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구름에 가려진 고단한 달빛에 의지해 희미하게 드러났던 여자의 뒷모습이 막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등허리에서 출렁이던 머리카락은 복도 끝을 돌아 계단을 향해 총총히 사라졌다. 계단을 급하게 내려가는 발소리가 다다다닥 들렸다. 두 사람도 그림자를 따라 뛰었다. 하지만 그림자는 바람처럼 빨랐다. 1층 화장실까지 왔으나 실루엣을 찾지는 못했다. 숨을 헐떡이며 제현이 말했다.
“겁먹지 마. 귀신은 아니야.” --- p.47
“담배 때문에 숙소 마당에서 벌을 설 때였어. 엎드려뻗쳐를 하고 있는데 내 몸에서 자꾸만 초코파이 냄새가 났어. 다 먹은 지 20분도 넘었는데 냄새가 계속 머물러 있더라고.”
“역시 정기동답다. 음식이 벌 받는 일을 뛰어넘게 하는구만.”
“이유가 뭘까 생각했는데……, 냄새뿐만 아니라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났어. 어둠 속에서 나를 지켜보며 지수가 내 초코파이를 먹고 있더라고.”
“와, 대박!”
아이들이 탄성을 지르며 어이없는 웃음을 웃자 기동도 따라 웃으며 말했다.
“근데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더라. 그게 위로가 됐어.”
“둘 다 비정상이라서 그런 거 아냐?”
“내 꿈이 만들어진 건 그때였어. 위로를 주는 달콤한 빵을 만드는 것.”
“그건 더 대박이다 야.”
감동적인 이야기야, 추임새까지 넣어가며 팔짱을 낀 채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지수를 제외하고 모두 고개를 절절 흔들었다. --- p.99~100
“혜진이가 말하는 함수 x값은 도대체 뭐냐?”
기동이 물었다.
“걔 오빠 시신을 다 못 찾았대. 시신 일부는 쓰레기봉투에 넣어서 이쪽저쪽 산에 버리기도 하고, 일부는 바다에 버리기도 했는데……, 그래서 혜진인 아직도 오빠가 완전히 죽었다는 걸 믿지 않는대. 오빠가 돌아오길 기다린다는 거야. 흩어져 있는 시신들이 집을 찾기를 기다리는 건지도 몰라. 길을 그리면 그 영혼이 찾아올 수 있다고 믿는 거야. 길을 그리는 게 바로 함수값 x인 거지.”
그때 지수가 흑 소리를 내었다. 빨갛게 변한 눈을 들어 습기 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길을 찾아주자…….” --- p.155~156
초록색 옥상 바닥에 하얀 페인트로 그린 그림이 있다는 것, 그것은 지도 같기도 하고 길 같기도 하지만 무수히 많은, 아주 정교한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이것은 신이 그린 어떤 지도일 수도 있고, 영화「싸인」에서처럼 외계인이 만든 미스터리 서클인지도 모른다는 것.
“물론, 이것은 인간이 그린 그림이 틀림없다. 왜냐! 바로 하얀 페인트통과 붓이 옥상 구석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외계인이라면 페인트와 붓을 이용해서 그렸을 리 없겠지. 신이라면 더욱.”
어디선가 킥킥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담임도 자신의 농담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는지 피식 웃었다. --- p.223
지수는 병실뿐 아니라 매일 아침 옥상을 찾았다. 그날도 아침 일찍 학교에 와서 옥상부터 올라가보았는데, 그곳 길 위에 누군가가 놓아둔 하얀 국화꽃 한 송이가 있었다고 했다. 국화꽃 이야기는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학교 전체로 퍼져나갔다. 별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교사들은 모르는 것 같았고, 아이들은 얼굴을 보면 꽃 이야기부터 했다. 그 꽃을 누가 가져다 놓았나가 아니었다. 하얀 국화가 의미하는 바를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길은 그렇다면 추모의 의미인 거냐? 누가 그 길 위에서 죽었다는 말인가? 혹은 어떤 영혼이 그 길로 걸어온다는 말인 건가? 그렇다면 학교가 그 길을 지워도 되나? 여전히 아이들은 진지했고, 길은 마치 모두가 지켜내야 할 마지막 보루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 p.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