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디외가 말하는 성찰적 사회학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띤다. 첫째, 사회학자가 한층 객관적인 지식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위치와 관점에 대한 사회학적 성찰이 필수 불가결하다는 것이다. 둘째, 이렇게 획득된 과학적 지식은 공론장에 되돌려지면서 구성원들의 성찰성을 증진시키고 해방을 가져오는 데 이바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학은 지배체제를 탈신비화하고 각종 구조적 제약에 대한 행위자들의 인식을 확장시킴으로써 그 변혁 가능성을 제고한다. --- pp.23-24
부르디외의 사회학적 전기를 새롭게 쓰면서 나는 그의 사유와 인간, 지적 기획과 사회적 궤적이 맺고 있는 복잡한 관계를 좀더 입체적으로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부르디외는 어떤 문화 산물이든 사회 발생적인 관점에서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으며, 모든 학문적 실천은 과학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이중 전략을 드러낸다고 주장했다. 부르디외 자신의 지적 생산물 또한 그러한 원리들로부터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다. --- p.34
먼저 부리코Francois Bourricaud와 부동 같은 우파 사회학자들은 과잉 기능주의라는 측면에서 부르디외의 사회학주의를 공격한다. 이때 사회학주의는 특정한 유형의 사회학적 문답으로 나타난다. 즉 그것은 ‘누가 사회구조와 제도(학교, 문화, 언어 등)로부터 이익을 얻는가’라는 질문이 유일하게 흥미롭고 적절한 것이라고 보면서, 그에 대해 원칙적으로 ‘지배계급’이라고 답한다는 것이다. 부리코와 부동은 이러한 사회학주의가 언제나 개인을 구조와 제도의 꼭두각시처럼 정의하면서 ‘음모 이론’의 익숙한 설명 도식을 이용한다고 주장한다. --- p.87
언젠가 폴 발레리Paul Valery는 “모든 사람이 소크라테스로 태어나지만, 단 한 사람만이 소크라테스로 죽는다”고 쓴 적이 있다. 이 장에서 나는 부르디외의 사유가 프랑스의 정치사회적 배경과 학계 내부의 역학 속에서 어떻게 발생했는지 통시적으로 살펴봄으로써, 베아른 시골의 가난한 집 소년 ‘피에르’가 비판사회학의 세계적인 고유명사 ‘부르디외’가 되기까지 거쳐온 우연하고도 불연속적인 궤적을 전체적으로 재구성해보고자 했다. --- p.91
적지 않은 이들이 1990년대 부르디외의 현실 참여로부터 ‘전기’ 부르디외와 ‘후기’ 부르디외 사이의 단절, 또는 이론과 실천 사이의 불일치를 보았다 해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특히 비판자들은 그가 말년에 왜 갑자기 각종 사회운동에 개입하면서 프랑스의 전통적 지식인 상을 구현하게 되었는지, 그의 사회학이 띠고 있는 구조주의적?결정론적?과학주의적 색채와 사회학자 개인의 의지주의적인 정치 활동이 어떤 식으로 조화될 수 있는지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이런 시선에는 물론 무지로 인한 오해 역시 적잖이 작용했던 것이 사실이다. --- p.133
부르디외의 계몽관에 내포된 난점들 역시 비판적 재고를 요한다. 정치학자 보두앵Jean Baudouin은 부르디외의 정치학이 ‘전위당’을 ‘지식인 엘리트’로 대체한 마르크스주의 혁명론의 변형본과 다를 바 없다는 신랄한 비판을 내놓은 바 있다. 우리가 이처럼 극단적인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부르디외가 견지한 일종의 ‘비판적 계몽주의’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미끄러질 여지를 갖고 있다는 점마저 부인하기는 어렵다. --- p.181
장 내부의 투쟁에서 언제나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쟁점이 되는 것은 ‘장의 경계 획정’과 ‘자본의 (재)정의’ 문제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컨대 문학 장에서는 ‘작가’의 범주에 누구를 포함시키고 누구를 배제할 것인가, 무엇을 그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 또 ‘문학적인 것’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등의 논쟁이 끊임없이 벌어진다. 장 내에서 어떤 합의가 잠정적으로 도출되는지에 따라 기존 세력 구도가 새롭게 조정되고 재편될 수 있기 때문에, 이 논쟁은 이론적인 만큼이나 지극히 현실적인 이해관계와 맞물려 있다. --- pp.211-212
한정적 용법의 장 개념은 주로 공적·직업적 활동을 포착하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상징자본(권위와 명성)을 주된 내기물로 삼는 영역을 연구 대상으로 구축한다. 바꿔 말하면 사적인 행위, 비非직업적 실천, 상징자본이 걸려 있지 않은 활동은 장이론의 분석 범위에서 벗어날 확률이 크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공적인 무대 바깥의 이른바 ‘일상생활’에서 펼쳐지는 사소하고 일시적인 상호작용, 비공식적이거나 제도화되지 않은 활동, 사회적 지위가 낮은 일 등은 이론적 시야로부터 빠져나가는 일종의 경험적 잉여로 남는다. 또한 장의 행위자 범주에는 직업이 없는 인구, 아마추어, 하층계급 등이 들어가지 않을 개연성이 높아진다.
--- p.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