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엄경』 보현행원품에는 보현보살의 10대행원(大行願)에 관해 설하고 있다. 보현보살이 실천하려는 열 가지 큰 서원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항상 일체의 부처님들께 예경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항상 여래의 공덕을 칭찬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항상 모든 부처님들을 받들어 모시되 최상의 공양을 제공하는 것이고, 네 번째는 항상 무시 이래로 지어온 악업을 참회하고 청정한 계율을 지키는 것이며, 다섯 번째는 일체 모든 불보살님들과 나아가 6취(趣)ㆍ4생(生)의 온갖 공덕을 따라 기뻐하는 것이고, 여섯 번째는 항상 모든 부처님들이 법을 설하시도록 권청하는 것이며, 일곱 번째는 불보살님들이 열반에 들지 마시고 세간에 머무시면서 법을 설하시도록 간청하는 것이고, 여덟 번째는 항상 부처님을 따라 부처님께서 펴신 법을 배우는 것이며, 아홉 번째는 중생의 종류에 맞게 응하여 갖가지 공양을 하는 것이고, 열 번째는 이상의 공덕을 널리 일체 중생들에게 회향하여 불과(佛果)를 완성하도록 하는 것이다. (16p)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부사의삼매(不思議三昧)에 들었느냐”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불가사의[不思議]란 마음이 있어서 능히 생각한다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어떻게 부사의삼매에 들었다고 말하겠습니까. 저는 초발심 때 이 선정에 들고자 하였으나 지금 사유해 보니 실로 마음의 모양[心相]이 없어야 삼매에 들어갑니다. 마치 활쏘기를 배움에 오래 익히면 곧 재주가 교묘해져서 후에는 비록 무심히 하여도 오래 익힌 까닭으로 화살이 날아가 모두 적중하는 것과 같이, 저도 또한 이와 같이 처음 부사의삼매를 배움에 마음을 한 곳에 인연하여 매어두어 만약 오래 익히면 다시 마음에 생각이 없이 항상 선정과 합(合)합니다.” (60p)
- 『석문의범(釋門儀範)』의 대예참문(大禮懺文)에는 “오랜 겁 전에 일찍 정각을 이루시고 한량없는 세계에서 중생의 어리석음을 교화하시며, 이미 용(龍)의 종자로 존경을 받고 다시 진리의 왕자로 불리어져 당체는 법계에 두루하고 신통은 사유하기 어려웁네. 교화는 무량 국토에 가득하여 삼세(三世)의 불모(佛母)이고 7불의 조사로세. 사바세계의 성스러운 가람에 확연히 두루 하고, 눈에 가득 문수 만나 대화하니 말끝에 활짝 열린 눈을 알지 못하고, 머리 돌려 다만 옛 산의 바위를 보네. 크게 성스러운 문수사리보살이라”고 찬탄하고 있다. (115p)
-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문수도량인 오대산 상원사의 문수보살 기도에 대한 영험은 조선조 세조대왕이 문수보살의 현전가피(現前加被)로 창병(瘡病)이 나았고, 그 화현(化現)인 문수동자상과 일화가 남아 참배하는 이의 신심을 새롭게 하고 있다. 상원사는 옛부터 선원(禪院)으로 많은 선지식의 선불장(選佛場)이 되어 성불로 가는 길목이 되고 있다.
문수의 지혜는 어느 누구나 성취하면 곧 부처가 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문수보살 기도는 지혜를 성취하는 기도라고 본다. 기도와 선정으로 지혜를 성취하면 마음이 맑고 밝아 항상 편안한 마음으로 공부도 잘하고, 시험도 우수하게 치뤄지고, 장사도 잘되고 사업도 잘하며, 대인 관계가 원만하여 모든 사람에게 희망과 기쁨을 줄 수 있는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117p)
- 신라 말년, 나라가 쇠잔하였을 때에 김부(金傅) 대왕(경순대왕, 그림)은 도학이 높은 고승을 청하여 나라의 재(齋)를 올리면서, 국태민안 하기를 기원하려고 신하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국내의 유명한 사찰에 고승ㆍ대덕을 추천하라고 하였으나, 추천하여 오는 고승이 없었고 입재하는 날 석양에 의복이 남루하고 행색이 초라하고 풍창병이 크게 걸린 중 하나가 자원하여 들어왔다. 재는 지내기로 하였고 시각은 급박하매 하는 수 없이 그 재에 참여케 하였더니 대신들은 큰 풍창병에 걸린 중이 참여한 재에 올렸던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의논이 분분하였다.
김부 대왕은 그 중을 보고 “내일 아침, 나라의 재에 참여하였다는 말을 누구에게도 하지 마시요” 하고 당부하였더니, 그 중은, “대왕께서도 누가 묻더라도 문수보살이 재에 참석하였다는 말씀을 하지 마시오” 하고는 동자로 변하여 빨리 달아나는 것이었다.
그제야 대왕은 놀라서 차비도 차릴 새 없이 따라갔으나 울산을 지나서는 어느 마을 앞에서 더 가지 못하고 “할 수 없다”고 탄식하였으니, 그 마을 이름이 지금의 ‘헐수정’이고, 또 거기서 십리쯤 더 가서 보니 간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 마을 이름을 ‘무거리’라고부른다. 거기서 십 리쯤 올라가서 망회(望回)라는 곳에서 사방을 바라보니 지금의 문수암 앞 암대(嚴臺) 위에 문수동자가 청사자를 타고 가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문수암 앞산에 올라가서 ‘문수보살님!’ 하고 세 번 불렀다. 그 후 그곳을 삼초대(三招臺)라고 한다.
그때 동자가 나타나서 “대왕께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거든 이곳에 절을 짓고 기도를 하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앞에 절을 지었으니 이름이 금선대(金山臺)다. (28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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