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저쪽’에서 혼자 오늘을 맞고 혼자 오늘을 보내고, 나는 ‘이쪽’에서 그저 안절부절못하면서 쳐다볼 뿐이다. ‘저쪽’과 ‘이쪽’ 양극단의 두 면을 어디서 어떻게 연결하고 엮어가야 하는 것일까. 생활면에서는 아직 돌보고 수발을 들 수 있지만, 어머니가 어머니 자신이라는 사실을 더는 인정할 수 없는 선까지 온 것이리라. --- p.17
우리는 서로 의존하게 되는 상태를 두려워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더 돌봐주기를 바라는 의존. 더, 더 달라고 내미는 손에 대한 의존. 서로가 서로를 사랑이라는 쇠사슬로 묶는 지배. 늘 상대에게 자신이 필요하다고 확인하고 싶어 하고, 서로가 서로를 구제해주기를 바라는 관계성. 끊임없이 자신을 차선으로 하는 역할에 뿌듯함을 느끼는 어머니와 딸이 되고 싶지 않았다. --- p.40
어머니가 어머니가 아닌 사람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그녀가 그녀가 아닌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각각의 상실의 장면을 눈으로 보면서 널뛰는 내 감정을 미처 감당해낼 수 없을 것 같을 때면 나는 속으로 외쳤다. 나는 용감해, 나는 울지 않아. --- p.80
허리를 낮춘 내가 두 손으로 어머니의 허리를 잡는다. 허리를 쭉 뻗으면서 어머니를 일으킨다. 울고 싶다. 어머니 말고 이 집에 다른 사람은 없다. 울어도 괜찮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에게 미소를 보낸다. --- p.139
어린 내가 어머니보다 빨리 죽는 것을 그렇게 두려워했다는 사실을 어른은 그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어머니조차 모르는 일이었다. 알게 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나를 억압하고 있었으니까 알 리가 없었다. --- p.163
어머니보다 먼저 죽을 수 없다는 생각은 어머니를 그냥 죽게 하지 않겠다는 생각과 겹쳐져 나를 용감한 투사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언젠가는 끝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견딜 수 있었다. --- p.166
세월을 건너뛰어 이 존재를 남겨두고 죽을 수는 없다는 서로를 향한 삶의 강한 의지. 어머니는 어머니라는 존재에서, 딸은 딸이라는 존재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 p.167
“오늘부터 푹 잘 수 있을 거야, 후유코.”
어머니가 그렇게 말한 것 같았다. 갑자기 콧속이 시큰해왔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머니의 의식이. 아직은 울 수 없다. --- p.175
과거를 공유하지 않으면 서로를 이해할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지금을 고스란히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 너머에 어떤 과거가 있든 고스란히 껴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다짐이기도 했다. --- p.203
나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거기에는 늘 마음을 앓고 있는 어머니가 있었다. 내가 혹시 어머니에게서 자유를 빼앗았던 것은 아닐까. 나는 어머니를 사랑했고, 어머니의 딸이라는 사실도 사랑했지만, 엄마가 될 자신은 없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 p.229
이질적인 존재, 외부인. 나도 줄곧 그랬다. 나는 모스 그린색 망토를 걸치고 언덕에 서 있는 루피너스 씨 그림을 보면서 생각했다. 어디에 있든, 뭘 하든, 내가 있을 곳이 없다는 생각이 늘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다 겨우 이 ‘광장’을 내가 있을 곳이라고 주저 없이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 p.236
이렇게 살다 나는 내가 나라는 것조차 잊어가지 않을까. 완전히 그렇게 되기 전에 나는 내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나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맞이해야 했던 몇몇 죽음을 생각한다. 그들은 대부분 미완성인 채로 그때를 맞았다. “언젠가는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살아갈 수도 있는 거야.” --- p.276
내가 아이를 갖고 싶지 않았던 것은 어린아이라는 무게를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를 홀로 남겨두고 죽어서는 안 된다고 나를 얽매었던 나날. 그 무게가 얼마나 컸는지 모른다. 나를 자식으로 맞은 어머니도 같은 무게를 줄곧 견디며 살았을 것이다. 혈연이라는 사슬을 먼저 벗어던질 수 있었던 것은 인지장애를 앓은 어머니지만. --- p.280
사람은 누구나 평범한, 그러나 어느 하나도 똑같은 것이 없는 책을 한 권 남기고 죽어간다. 서점이나 도서관, 누군가의 서가나 고서점, 그 어디에도 진열되지 않는 한 권의 책 말이다. 누군가가 그 사람을 떠올릴 때가 아니면 펼쳐지지 않는 한 권의 책. 그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그 한 권의 책도 바로 사라진다. --- p.289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미 저세상으로 다 떠났다.
‘광장’의 로고가 찍혀 있는 편지지 끝에 서명하고 날짜를 쓴 다음 봉투에 넣었을 때, 오래도록 참아왔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이제 죽어도 괜찮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큰 안식이었다. 미련도 없다. 그것은 큰 해방이고 자유였다. 이제 한동안은 울기로 하자. 나는 그렇게 다짐하고, 눈물의 감촉을 즐겼다.
“이제 울어도 돼.”
그런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내가 사랑했던, 그리고 떠나보낸 사람 중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 p.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