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세 1936년, 丙子, 불기 2963, 단기 4269, 中華民國25, 昭和11
해인사로 거처를 옮겨 퇴설당에서 참선 정진을 하였다. 퇴설당은 1924년에 선원으로 확장되었다. 속인이 선원에서 참선 정진을 한다며 반대 여론이 있었으나 주지 이고경李古鏡, 1882~1943의 호의로 정진을 계속하였다. 1935년에 해인사 강원과 다솔사 강원이 합병되어 다솔사 강사였던 김법린1899~1964이 해인사에서도 강의를 하였다. 이때 김법린이 스님을 만나 교학 연구를 권하였다.
3월 3일 범어사 조실 하동산河東山, 1890~1965 스님을 은사로 해인사에서 사미계를 수계하고 득도하였다. 도첩과 해인사 승적첩에는 은사가 ‘하용봉河龍峰’으로 표시되어 있다. --- p.41
30세 1941년, 辛巳, 불기 2968, 단기 4274, 中華民國30, 昭和16
깨달음을 얻어 오도송을 읊고 나서 깨달음의 점검을 위해 제방에서 정진한다.
이 해는 아버지 이상언의 회갑이었다. 장남이 없이 절을 받을 수 없다 하여 절도 받지 않고 가족사진 촬영도 하지 않았다. 다만 부부의 사진만 남아 있다. --- p.50
36세 1947년, 丁亥, 불기 2974, 단기 4280, 中華民國36, 昭和22
가야총림과 관련한 사항을 청담 스님에게 일임하고 도우 스님과 통도사 내원암으로 옮겼다. 청담 스님은 하안거에 가야총림에 합류하였다. 김병룡 거사에게 불서를 기증받기로 약속하고 해제하면 봉암사로 옮길 예정을 세웠다.
가을에 봉암사결사가 시작되었다. 김병룡 거사에게 불서를 기증받고 봉암사 극락전에 모셨다. 이때 김병룡 거사에게 기증받은 불서를 정리한 『수다라총목록』에 따르면 총 59부 1,773권이며 스님이 직접 “정해년 중추에 희양曦陽 명찰 봉암선굴鳳巖禪窟에 모셨다”고 적고 있다. --- p.77
40세 1951년, 辛卯, 불기 2978, 단기 4284, 中華民國40, 昭和26
2월 28일 월내 묘관음사에 1946년 입적하신 운봉 성수 스님의 진영을 모시면서 진영찬을 지었다.
경남 통영의 안정사 은봉암에서 하안거를 지냈다. 모이는 사람이 늘자 안정사 주지에게 양해를 구하고 안정사와 은봉암 사이에 초가삼간의 토굴을 지어 천제굴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천제굴을 짓는 데에 당시 성주사 주지였던 문일조文一照 스님의 역할이 컸다고 전한다. 천제굴 시봉은 주로 법전 스님이 하였다. 천제굴에서 비로소 신도들에게 3천 배와 아비라기도를 하게 하였다. --- p.83
44세 1955년, 乙未, 불기 2982, 단기 4288, 中華民國44, 昭和30
파계사 한송 스님의 초청으로 파계사 성전암으로 옮기려고 하였으나 건물 보수를 위해 법전 스님이 먼저 수리를 하고 스님은 임시로 경남 남해의 용문사 백련암에 머물렀다.
9월 비구측이 19개 사찰의 관리권을 접수하면서 해인사 주지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대신 자운 스님이 취임1955. 9. ~1957. 7.하였다. 가을에 파계사 성전암에 철조망을 두르고 10여년간 두문불출하며 외부의 출입을 막았다. 이것을 후세에 “10년 동구불출”이라고 불렀다. --- p.90
54세 1965년, 乙巳, 불기 2992, 中華民國54, 昭和40
경북 문경의 김용사金龍寺에서 조실로 머물렀다.
4월 30일에 동산 스님이 입적하였다. 1967년에 세운 동산 스님 사리탑비의 비문을 지었다.
9월 1일 대학생불교연합회 회원들의 13일간의 구도행각 중에 김용사를 방문하자 3천 배를 시켰다. 9월 2일부터 이틀에 걸쳐 “불교의 근본사상인 이변離邊중도로부터 시작하여 불교에서 본 우주의 실상, 우리가 이 실상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 그 방법론 등”을 현대학문의 방증을 들어 설법하였다. --- p.101
56세 1967년, 丁未, 불기 2994---2511, 中華民國56, 昭和42
또한 이날, 이틀 후7월 25일에 해인사에서 열릴 종회에 앞서 중대 논의를 위해 청담 종정의 소집으로 70여 명의 중진 스님이 모인 종단중진회의가 해인사에서 열렸다. 성철 스님도 참가하였다. 중진회의는 25일 정오까지 이어져 자연스럽게 제16회 임시중앙종회 본회의로 이어졌다. 이 회의에서 해인사에 방장 체제의 해인총림 설치가 결의되면서 성철 스님이 해인총림 방장에 추대되었다.
10월 20일음 9월 17일 선림회 제2회 임시총회가 해인사에서 열려 80여 명의 회원이 모였다. 회의에서 성철 스님의 시중법어示衆法語가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3일간 스님의 법문이 있었다. 내용은 깨달음의 강조와 돈오돈수 설파, 증도가 강설이었다. --- p.127
70세 1981년, 辛酉, 불기 2525, 中華民國70, 昭和56
1월 10일 정화중흥회의 체제에서 원로회의가 열려 종정에 성철 스님을 추대하였다.
1월 20일 조계종 제6대 종정 취임식에는 나가지 않으셨다. 대신 취임 법어를 취임식장에서 원로원장 영암 스님이 대독하였다. 1월 20일은 음력 12월 보름이었으므로 스님은 총림에서 대중법문을 하였다.
이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놡라는 법어가 화제가 되었다. --- p.167
82세 1993년, 癸酉, 불기 2537, 中華民國82, 平成5
9월 21일 출판기념회관에서 선림고경총서 완간 기념회가 열렸다. 10월 7일 백련불교문화재단의 주최로 해인사에서 “선종사에서 돈오돈수사상의 위상과 의미”라는 주제로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다. 11월 4일음 9월 21일 오전 7시 30분 해인사 퇴설당에서 “참선 잘 하라”는 말을 남기고 입적하였다. 세수 82세, 법납 5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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