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 너울을 쓴 자들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며(가령 달이나 별을 따거나 꽃을 꺾으려고) 순례하듯 길을 나서는 것은 결국 자기 참모습을 찾아내려는 것 아닐까.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은 그와 나는 사실은 한 사람인데, 동전의 양면처럼 어느 한쪽은 허깨비이거나 그림자이고 다른 한쪽은 참모습이 아닐까. 우리 두 사람이 서로의 모습에서 자신의 참자아를 찾아내라고 신이 대면하게 해준 것 아닐까. --- p.11
“제 도씨는 저보다 늘 한참 젊게, 십 년 이십 년은 더 젊게 사는 놈입니더. 철없던 젊은 시절의 저를 극성스럽게 본떠서 행동하지예. 보라색의 굽 높은 중절모를 쓰고, 오래 입어서 소매 끝이 닳은 진한 벽돌색의 양복저고리에 검정 바지를 입고, 부드러운 밤색 구두를 신는 기라예. 살찐 통마늘 같은 코와 쌍꺼풀진 눈매에 눈썹이 넓고, 자잘하고 눌눌한 옥니가 드문드문하고, 반곱슬머리인 도씨의 모습은 제 눈에는 보이지만 저 이외에 어떤 사람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투명한 존재입니더. 모습만 투명한 것이 아니고, 목소리도 하얗게 바래고 체취도 없어서 제 아내도 살았을 적에 이놈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어예. 이놈은 길이 잘 든 애완동물처럼 저를 따르는데, 제가 이놈과 말을 주고받으면 아내는 혼자 뭔 말을 그렇게 중얼중얼해쌓느냐고 애교 어린 볼멘소리를 하곤 했지예.” --- p.27
“꽃길에서는 꽃의 권력을 따라야 한다”는 고재종 시인의 시 한 대목을 떠올리고, 이 여자 앞에서는 이 여자의 권력에 따라주자 하고 그는 생각했다. 동시에 암소의 고삐를 잡고 풀을 뜯기는 머리털 허연 노인으로 하여금 위태로운 절벽 가장자리에 피어 있는 꽃을 꺾어다 바치며 「헌화가獻花歌」를 읊게 한 『삼국유사』 속의 귀부인을 생각했다. 가마에 앉아 있는 지체 높은 여인의 자태가 얼마나 고혹적이었으면 노인이 소의 고삐를 놓고 위험을 무릅쓰며 아슬아슬한 절벽에 피어 있는 꽃을 꺾어다 바쳤을까. 귀부인을 가마에 태우고 온 여러 젊은이들은 다 절벽이 위태로워 나서려 하지 않는데 노인이 그리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절벽에 빨간 철쭉꽃들이 난만한 봄에 그 노인은 봄꽃(귀부인)의 고혹적인 권력을 따른 것이고, 그것은 생명을 담보로 한 사랑의 꽃이다. --- p.115~116
나는 그가 노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회老獪는 늙어서 교활해진 것을 말한다. 교활한 노인은 추한 잘못을 저질러놓고 그것을 열심히 합리화하며 산다. 노인이 된다는 것은 모든 탐욕의 삶에서 벗어나(해탈하여) 고고한 사유와 명상과 도락의 삶을 즐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인데, 영육에 보석 같은 사리가 앙금처럼 켜켜이 가라앉도록 살아야 하는 것인데, 마음 가는 대로 자유자재의 삶을 살아도 법도에 어그러짐이 없다는 공자의 말은 바람처럼 걸림 없는 해탈의 삶으로 나아간다는 것인데, 깨끗한 모습으로 역사와 자연의 섭리 속으로 사라질 준비를 참하게 해야 하는 것이 늙은이의 당면 과제인 것인데 말이다. 도덕 교과서 같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스스로가 한심스러워지면서도 나는 그를 비난하고 있었다.
호랑이가 고양이를 만나면 조그마하고 쩨쩨한 놈이 건방지게 임금 자리에 있는 자신을 닮았다고 갈가리 찢어 죽인다는 말을 나는 오래전에 들은 바 있다. 그는 나를 만날 때마다 반겼고 여행팀에 합류한 것을 운명적이라고 기뻐했지만 나는 싫은 정이 앞섰다. 나를 닮은 그가 내 속을 속속들이 읽고 많은 것을 훔쳐다가 사용하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끔찍스러워지곤 했다. 내가 견딜 수 없는 것은 그에게서 발견되는 나의 약점들이다. 코를 찡긋거린다든지, 말을 하다가 혀를 내둘러 마른 입술을 축인다든지, 어깨를 으쓱한다든지, 실없는 말을 해놓고 나서 건들바람처럼 웃는다든지 하는 것들이 싫었다. --- p.215
저는 가끔 절에 가는데 시줏돈 몇 푼을 미끼로 부처님과 스님을 낚고, 부처님과 스님은 해탈과 설법을 미끼로 저를 낚습니더. 기독 신앙이 독실한 친구가 있는데, 친구는 염봇돈 몇 푼과 십일조를 미끼로 신과 천국을 낚고, 사제는 신과 천국에 대한 설교를 미끼로 해서 친구로부터 염봇돈과 십일조를 낚습니더. 모든 존재하는 것은 다 거래를 하고 삽니더. (…) 그런데 그 여자는 신이 저를 낚으려고 내민 미끼입니더. 아니, 신이 어떤 필요에 의해서 그 여자를 낚아 올리기 위해 저를 그 여자 앞에 미끼로 내밀었는지도 모릅니더. 그러고 보면 신은 인간이 낚은 가장 편리하면서도 위대하고 성스러운 존재입니더. 그런데 신은 무얼 낚기 위해 저와 그 여자를 미끼로 활용하는 것일까, (…) 신에게 낚이는 것은 신의 세상으로 편입된다는 것입니더. (…) 사랑이라는 것도 하나의 거래입니더. 우리는 신이나 부처님의 미늘 없는 낚시에 낚여서 천국으로 한 발짝씩 걸어가고 있습니더.”
--- p.265~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