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예술계 실무자로서 현장에서 시행착오를 겪어오면서 거래의 기본이 되는 계약에 관한 간소한 지침서조차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안타까웠다. 공연거래 분야는 일반적인 국제상거래나 계약법 원리의 기계적 적용이나 외부 전문가의 시각에서가 아닌 현장 실무자 입장에서의 방법론이 절실한 분야이기에 그러한 아쉬움은 더했다. 동종 업계의 지식을 축적하고 표준화하여 실무에 임하는 선진국의 거래상대방들을 관찰하면서 언젠가부터 실무에서 접하는 양식과 사례, 방법론들을 정리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의 독려에 용기를 얻어 실무자로서 필자 고유의 방법론에 기초해 집필한 국제엔터테인먼트계약 입문서『 계약에서 공연장까지: 국제공연계약의 이론과 실제』가 세상이 나온 지 어느덧 5년이 되었다.
책의 출간 이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다양한 독자층에서 보여주신 적극적 관심은 국제거래와 엔터테인먼트법 분야에 대한 체계적 연구에의 소망을 간절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후속 작업에 대한 구상을 마음 한 켠에 심은 채로 정든 현장을 떠나 뒤늦은 유학길에 올랐다. 마침 미국 법학교육기관 중 가장 먼저 문화예술·엔터테인먼트법 전문 학술지(Cardozo Arts & Entertainment Law Journal)를 발간하고 예술법 관련 임상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젊고 열린 학풍으로 다양한 실무자들을 배출해 온 벤자민 카도조 로스쿨에서 지적재산권과 엔터테인먼트법 연구를 위한 좋은 환경을 제안해 준 덕분이었다.
공연예술산업의 한복판에서 보낸 시간은 문헌과 현장에서의 경험에만 의존해서 집필한 첫 실무서가 무색해질 만큼 저자를 겸손해지게 했다. 뉴욕의 브로드웨이, 링컨센터와 카네기홀, 브루클린 등은 물론, 워싱턴 D.C.와 보스턴, 탱글우드 등 인근 동부지역의 공연예술현장들을 신발이 닳도록 찾아다니며 다양한 현장 전문가들을 만나 궁금했던 것을 보고, 묻고, 체험했다. 귀국 후 보다 체계화된 실무 지침서를 출간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고 산업계의 변화를 조사하다 보니 최소한으로 추가해야 할 양만도 상당하다는 것을 알았다. 매체와 시장 환경이 변했고, 관련 법과 제도는 그 안에서 수차례 변화를 겪었다. 한편, 공연산업계에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사례들이 출현했다. 요원할 것만 같던 ‘예술인복지법’이 국회를 통과하여 예술인 동업조합과 표준계약서 제도의 운용에 관한 후속 작업이 이루어진다는 뿌듯한 소식도 있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증보 개정판의 형식으로 시작된 이 책의 원고는 처음부터 새로이 집필됐다.
이 책은 법에 관한 이론서라기보다는 문화에 관한 실무서이다. 국제공연계약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조항의 이면에는 반드시 특정한 문화적 배경이 자리하고 있기에, 섬세한 예술가들에 관한 계약 사항을 일상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공연 실무자들이 상대방의 문화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성공적 협상의 단초가 된다. 사실 법조문이나 법원리를 알지 못해 실수하는 경우보다는 상대방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협상이 어려워지는 일이 훨씬 많다. 젊은 시절 해외 유학을 떠날 때 어학도 전공도 아닌 그 나라의 춤을 배우는 일에 가장 공을 들였다는 어느 명사의 이야기는 다른 문화권의 동료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문화적 코드를 익혀야 한다는 지극히 전략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이었다. 세계인들과 적절히 소통할 수 있는 문화적 교육과 소양을 갖춘다면, 공연 담당자도 훌륭한 ‘민간 외교관’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 글에서 시도한 ‘문화적’ 곁눈질은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복안을 염두에 둔 것이다. 즉, 한류(韓流)의 지속적인 열풍 등 최근 우리나라 문화예술상품의 세계시장 공략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세계시장 진출에 대한 초석을 마련해 보자는 것이다.
이 책은 그와 같은 총체적 관점에 입각해, 국제공연거래의 원리와 관행들이 어떠한 배경에서 생성되었으며 나아가 실무에서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에 역점을 두어 기술했다.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는 흔히 접하기 어려운 서로 다른 영역 간 융합(融合, convergence)과 통섭(統攝, consilience)을 아낌없이 시도했다. 논의의 대상 면에서는 법과 상거래와 공연예술이라는 서로 다른 영역의 만남을 시도하였고, 논의의 방법 면에서는 기본적인 법적 원리를 소개하면서 동시에 실천적인 지침서로의 역할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세부적으로는 영미법과 대륙법이, 국내시장과 국제시장이, 영리와 비영리 범주가 함께 등장하였고, 구체적으로는 공연, 영화, 음악, 출판 등 문화예술산업 내 다양한 비즈니스의 계약관련 사례들이 도처에서 만나 스스럼없이 서로의 방법론을 교환하였다.
이 책은 저자가 법과 공연을 매개로 만났던 수많은 인연들이 없었더라면 결코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한결같은 격려를 뢺내주신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경영과의 홍승찬 교수님, 이승엽 교수님, 전수환 교수님, 다양한 프리즘을 지닌 법학자의 시각을 열어주신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조홍식 교수님, 그 외 귀한 가르침을 주신 선배님들께서는 이 저작물의 지적 원천이 되어주셨다. 수업을 통해 생생한 의견을 교환해 준 학생들과 공연예술 실무 현장에서 기쁨과 어려움을 나눈 동료들의 존재는 더없이 소중하다. 이 책이 빛을 볼 수 있도록 특별한 응원을 보내주신 성균관대학교 경영학과 유필화 교수님과 열과 성을 다해 책을 만들어주신 도서출판 오래의 관계자들께도 감사를 드린다. 마지막으로 후학을 위한 새로운 분야의 개척에 격려를 아끼지 않으시며 이 책의 출간을 누구보다 기다리시다 지난해 말 영면하신 고 정귀호 전 대법관님의 아름다운 영혼에 깊은 애도를 전한다.
문화예술계에서 일하면서 얻은 깨달음 중 하나는 문화의 본질은 역사라는 것이다. 문화란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있는 것들과 가장 거리가 먼 영역이다. 애초에 공연 관련 실무서를 고안하면서, 우리 공연예술계의 예술가들과 실무자들을 위한 공동의 작업지침서를 꿈꾸었다. 저자가 취할 수 있는 정보와 경험들은 물론, 동료들의 실무방법론도 함께 용해시켜 보고자 했다. 참여와 공유의 제작환경이 대세가 될 21세기에 적합한 지식인프라의 구축은 미래를 꿈꾸는 실무자들에게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판을 거듭할수록 더 많은 실무자들의 경험과 지적재산이 축적되는 방식으로 집필되는 공동의 공연실무서, 업계 전반이 함께 만들며 공유할 수 있는 ‘위키피디아’와 같은 저작물을 꿈꾸어본다. 모쪼록 이 책이 다양한 시행착오와 방법론이 쌓이면서 일신우일신 성장해가는 ‘현재진행형(Work in Progress)’의 공동저작물로서 자리매김했으면 한다.
공연기획자들은 공연이라는 매체를 통해 예술가와 관객 사이의 소통을 극대화시키는 또 다른 장인들이기에,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의 아버지이자 뛰어난 매니저이기도 했던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이들을 일러 ‘예술가에 못지않은 예술가’라고 했다. 그래서 이 책은 무대 위의 건반들만이 공연을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진정 공연을 일어나게 하는 것은 그 뒤에서 숨은 협상을 이뤄내고 그 결과를 인내심 있게 집행하는 손과 입과 발들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들의 땀방울과 열정에 바치는 저자의 소박한 헌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