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한테 ‘안국동 아줌마’ 하던 아이가 임금님이 되었다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명복이는, 아니, 임금님께서는 장난이 심한 것 빼고는 총명한 왕자님다웠습니다. 또한 돌아가신 임금님과 가까운 왕족은 흥선군 대감 댁 말고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 바로 보았다. 이렇게 사람 볼 줄 아는 눈이 생기는 것도 다 학문 덕분이다.” 그러나 민승호는 정호가 안쓰러웠다. 명복이처럼 왕족으로 태어났으면 왕이 될 수도 있고, 사내아이로 태어났다면 과거 시험이라도 볼 수 있을 텐데, 불행하게도 정호는 왕족도 아니고 사내아이도 아니었다. 이런 민승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호는 생긋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임금님의 얼굴을 실컷 보아 둘 걸 그랬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임금님의 연 날리는 솜씨는 천하일품인데…….” 이 말에 민승호는 정호가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아무래도 누이동생인 정호가 자신보다 더 생각이 깊은 것 같기 때문이었다. ---p.34
“사실은 제가 긴장을 해서 몹시 목이 탑니다. 하여 대비마마께서 주시는 것이니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이 말에 다른 규수들은 깜짝 놀란 눈으로 정호를 바라보았다. 놀라기는 조대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정호는 태연하게 수정과를 들어 단숨에 절반쯤 마셨다. 한번에 다 마시기는 숨이 찼고 예의에도 벗어날 것 같아서 소리 나지 않게 수정과 그릇을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 그 모습을 본 조대비는 커다랗게 웃었다. “아주 대차고 소신이 뚜렷한 규수로구나. 어느 댁 규수인고?”---p.42
“상감마마, 이대로 가시면 위험하오니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시고 자리를 옮기도록 하십시오. 그래야 안전하실 것입니다.” 이번에도 고종 임금은 김옥균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면 일본군을 부르도록 하라.” 그러나 왕비는 일본군을 부르러 가는 김옥균을 황급히 불러 세웠다. “일본군을 부르면 청나라 군대가 가만히 있을 것 같소? 청나라 군대도 함께 부르도록 하시오.” 왕비가 일본군과 함께 청나라 군을 부르도록 한 것은 조선에서 청나라와 일본의 대결이 일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위기의 순간일수록 더욱 예리해지는 왕비는 이처럼 정확한 판단을 내렸지만 김옥균은 왕비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p.122
“중전마마는 여기 안 계신다.” “그래?” 이 한마디와 동시에 파랗게 날이 선 일본도가 허공을 갈랐다. 동시에 이경직의 양팔이 투둑, 하고 피를 쏟으며 바닥에 떨어졌다. 이어서 날아온 일본도는 이경직의 가슴으로 향했다. 이 광경에 궁녀들은 주먹 쥔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벌벌 떨기만 했다. 왕비는 이경직의 팔이 떨어지는 순간 옥호루 뜰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몇 발짝 달리기도 전에 흉도의 손이 왕비의 팔을 낚아챘다. 흉도의 손에 의해 몸이 뒤로 확 젖혀질 때, 그때 왕비가 본 것은 일본인 흉도의 얼굴이 아니라 이경직의 가슴에서 분수처럼 솟는 피였다. (중략) 한동안 흉도의 눈을 날카롭게 쏘아보던 왕비는 마침내 이렇게 외쳤다. “그래, 내가 조선의 국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