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수 원장이 내게 말했다. 남자의 아랫도리 일을 발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말을 바깥에 대고 할 수 있느냐. 성매매했다고 해서 그것이 뭐 어떠냐. 많은 교수들이 그 일로 내게 부정적인 의견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화까지 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임 원장의 생각이 많은 법전원 교수들의 일반적 생각이라는 점은 잘 알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더욱이 보수 성향이 강한 대구지역에서 성매매나 성적 추문의 고발이 설 자리는 없다. 대학사회에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일방적 권력지배 관계에서 교수가 학생들에게 저지르는 성적 비위도 적지 않다. 누구도 이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말하면 매장된다. 그러나 그래서야 되겠는가. _pp. 73-74, 막장드라마의 한가운데
16일로 예정된 선고 재판이 자꾸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아, 제발 별일이 없어야 할 텐데. 만약 검사의 구형처럼 징역형이 나오면 어쩌지? 명예 하나만을 지키며 살아온 내 인생 전체에 먹물을 튀길 텐데. 그리 될 리가 없어. 여러 징후로 보아 절대 그럴 리가 없어. 이렇게 자문자답하며 하루를 지냈다. 내가 관여할 수 없는 요인에 의해 내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은 처절한 아픔이다. _p.161, 희미한 불빛
내가 그래도 자부심을 갖는 것은 아이들에게 단 한 번도 무엇을 했으면, 어떤 길로 나갔으면 한다는 따위의 말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직 자신이 원하는 대로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며 살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해 왔다. 지금 나는 단지 아이들이 좀더 평탄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다하고 싶다. 그리고 아이들이 구김 없는 성장을 거쳐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의식을 부족하지 않게 갖추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_pp.193-194, 끝이 없는 길
내부고발자들이나 사회에서 도태된 사람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에게도 그런 어두운 충동이 가끔 불쑥불쑥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충동이 올라오면 앞날이나 다른 것을 보는 눈이 갑자기 가려지는 듯했다. 누명을 덮어쓰고, 세상의 오해에 시달리고, 로스쿨 교수들의 집단적 린치를 받아야 했을 때 내 앞에서 빛은 사라졌다. 신앙과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간신히 빛을 다시 찾아주곤 했다. _pp. 202-203, 숙성의 시간
집 안 여기저기 철쭉이 활짝 피었다. 새들이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부드러운 봄바람이 너울거렸다. 아내와 함께 마루에 앉아 꽃들을 감상하며 보이차를 마셨다. 이런 좋은 풍광을 두고 나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남과의 시비에 얽혀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소란한 상태를 연출하고 있다. 이 어리석음을 무엇으로 변명할 수 있을까? 하루라도 빨리 이 미망의 번거로움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렇다고 하여 공정과 정직이라는 내 평생을 관통하는 원칙을 저버릴 수도 없는 일 아닌가. _p.237, 파열
중첩된 멍에가 힘겹다. 어느 경우이든 진실은 내게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진실을 관철시키지 못한 채 비틀거린다. 나는 과연 억울하게 씌워진 멍에들을 무사히 벗고 나올 수 있을까? 오! 주님, 어리석은 저에게 지혜를 주소서. 저의 작은 힘이 강성해지는 은총을 주소서. _p.242, 파열
“도대체 저 사람은 왜 항상 저럴까?”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을 본의 아니게 아프게 했습니다. 저에 대한 오해는 길에 굴러다니는 돌처럼 흔했습니다. 나이 60이 넘어 이 모든 것들이 제 주위를 둘러싸는 것을 살펴보니 후회막급이었습니다. 요즘 저는 “나는 도대체 내 일생을 통해 무엇을 추구한 것인가?”라는 의문에 자주 사로잡혔습니다.
아내가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어떤 분들이 저를 대법관 후보에 가장 적절하다며 열렬히 지지, 성원하는 글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분들은 저와 어떠한 관계도 없습니다. 물론 만난 일 자체도 없습니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제 눈시울이 젖어 왔습니다. 제가 인생을 완전히 헛되이 산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약육강식의 우리 사회에서 구석으로 내몰린 저분들이 저를 바라보며 거는 엄청난 기대가 제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_p.254, 절망의 끝
종일 힘이 빠지고 정신이 산란했다. 박완서 선생은 20대 때 6ㆍ25전쟁의 참상을 온몸으로 겪으며 ‘세상의 똥구멍’을 보았다고 했다. 나는 60이 넘은 이 나이가 되어 그것을 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정말 ‘세상의 똥구멍’이다. _p. 256, 절망의 끝
삼형제가 함께 먼 여행을 떠났다. 아이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뭉클 솟는다. 목소리라도 한 번 듣고 싶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바로 내 삶의 원동력이다. 한 번씩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을 품는다. 너희들이 있음으로 해서 얼마나 내 삶이 풍부해졌는지 모른단다. _p. 296, 촛불시민혁명
아, 나는 들판의 풀잎처럼 세상의 음습하고 불쾌한 바람을 조금의 여과도 없이 그대로 맞고 있다. 벌써 4년째다. 아침에 일어나면 또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하는 막막함에 어깨가 내려앉는다. _p. 303, 촛불시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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