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나는 시란 시간이라는 망각의 폭력성 속에서 살아가는 자가 내 미는 어떤 ‘확산의 디테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디테일로 시간의 구성을 파고드는 존재의 기획.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사이에서 감응이 일어나고, 그 다음 두 사람의 변신이 도모되는 과정. 이 과정은 시간의 계량적 전개를 뛰어넘는 어떤 ‘하기’라고 생각해왔다.
--- p.42 김혜순(시인), 「죽음이 먼저인 행성에서」 중에서
분명 나는 기차 안에서 ‘당장’이라는 시(時) 개념 안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정확히는 못한 채) 거의 지 워진 채로 내가 없는 곳을 공상하면서 기쁨을 느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것은 기묘한 공간감이었다. 출발해 ‘버렸고’ 도착할 ‘예정’이었고 ‘여기’와 ‘거기’라고 말할 틈도 주지 않았다. 뒤틀리지 않았다. 왜곡 없는 직선이었다. 예정은 결과로 도출되고 결과는 다른 예정으로 가고 있었다. 사라지지 않았다. 있지도 않았다. 지워지고 나타나는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 그 정해진 수순에서 나의 기쁨은 어디서 오는 것이었을까.
--- p.48 유희경(시인), 「한 시간 사십오 분-서울에서 광주 혹은 광주에서 서울」 중에서
그를 찍은 한 장의 사진에서 여기까지 와버리고 말았다. 그는 나의 연인도 아니었으며 친구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도 아니었다. 누군가를 죄책감 없이 좋아하게 된 첫사람,이라 말하자니 조금은 비장해지고 엷은 꽃잎처럼 내 인생에서 가볍게 떨어져나간 사람이라 말하려니 약간은 부족하다. 그를 떠올리다 선별되고 산란되고 얼었다 녹기도 하는 마음을, 흩어지고 고이고 멈추고 끝나는 사랑을 떠올리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닐 테다. 너무 많은 것을 닮은 사랑과 시간은 닮았다는 생각을, 그것에 대해 느긋하게 말하기에는 역시 산문이 좋겠다는 매일 하는 생각을, 마치 처음인 듯, 또 한 번 되풀이한다.
--- p.55 김봉곤(소설가), 「플래시백이 없는 동안」 중에서
인생이라는 시간을 형상화할 때 소쿠리가 떠오른다. 여러 추억이 방울방울 여물어 소쿠리에 소복이 싸여있는 모양. 그 ‘추억방울’들이 즐거움, 몰입감, 성 취감 등 아름다운 색채의 것이었으면 한다. 물론 스트레스와 고통의 결정체가 없을 수는 없겠지. 그래도 가능한 적었으면 한다. 그래서 반복적으로 스트레스를 주는 요인은 제거하려 궁리하고 좋은 기분과 만족감을 주는 일을 좇는다. 결국, 쓸데없는 일로 시간 보냈어도 즐거웠으면 됐다고 생각하며 죄책감 느끼지 않는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다.
--- p.60 최서윤(작가), 「반백수의 시간 관념」 중에서
세상은 우리를 사초를 쓰는 현대의 사관이라고 부르지만, 우리는 날마다 ‘오늘’ 일어난 일을 쫓아다니는 자신을 자조적으로 ‘하루살이’라 부른다. 세상에 존재하는 숱한 이해집단을 모두 만족시키는 문장은 드문 것이어서, 편집된 기사를 공기 중에 날려 보내고 나면 원망이 섞인 말들을 듣는다. 왜곡이나 곡해 없이, 균형을 잡았다고 믿고 싶지만, 이 직업의 본질이 양면적이다. 균형감을 강조하면 서도 어떤 시간에 더 주목할지, 어느 쪽의 어떤 말을 들을지에서 이미 균형추를 어디로 기울일지 결정해야 한다. 객관을 추구하면서도 저널리즘의 본령에 따른 것일지라도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하게 된다. 과연 오늘의 판단이 맞나, 제대로 편집했나에 대한 의심, 취재원들의 다양한 반응은 저녁 뉴스가 끝나는 밤이 되면 칼이 되어 목 안으로 들어온다. 목으로 삼킨 칼자루는 횡격막 근처에 차곡차곡 가라앉아 있다, 퇴근 무렵 홀로 운전대를 잡고 덜컹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면 질서 없이 무너져 내려 내부 어딘가를 형편없이 찢어놓는다.
--- p.66 김인정(광주 MBC 기자), 「리와인드」 중에서
허블 우주 망원경이 찍은 허블 딥 필드 사진을 들여다본다. 이 사진이 바로 아득한 우주의 심연을 들여다본 모습이다. 수많은 은하가 보인다. 우리 은하와 같 은 나선 은하도 있고, 멀어서 그저 별빛처럼 보이는 은하도 있으며, 더욱 멀어서 희미한 흔적만 보이는 은하도 있다. 이 은하들은 아득한 거리를 유한한 속력으로 날아온 빛에 실린, 까마득한 태고의 존재들이다. 딥 필드는 우주가 갓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모습을 한 장에 간직하고 있는 사진첩이다. 우주의 사진이란 언제나 이렇게, 그 안에 시간까지 함께 담고 있다.
--- p.72 이강영(물리교육과 교수), 「시간을 담은 사진」 중에서
공 박사가 죽은 지 3개월. 나는 매주 지하실에서 로또 당첨 번호를 검색했고, 그 페이지를 찍은 사진을 과거로 보냈다.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매주 교회 가는 길목에 잠깐이다. 또 정말로 로또에 당첨될지도 모른단 기대 때문에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매번 그의 이메일을 확인해도 새로운 메일은 도착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에게 배운 대로 마인드컨트롤을 했다.
--- p.88 김동식(소설가), 「이상한 아르바이트〉중에서
만물의 아카이브, 완전한 박물관의 21세기적 은유의 후보로 그럴싸한 것은 미술관이 아니라 가상현실이 아닐까? 가상현실을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보면서 이를 사진, 영화, 비디오 혹은 게임과 같은 계보에서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가상현실은 사진, 영화, 비디오, 게임은 물론이고 책, 음악, 회화, 조각, 건축, 공연 및 나아가 삶을 둘러싼 모든 것을(심지어 가상현실 그 자체를) 그 세계 내에 포괄할 수 있는 메타적 매체의 이념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 p.138 유운성(영화평론가), 「사진 없는 유토피아」 중에서
회화는 사진의 시간을 불러옴으로써 자신의 시간을 갱신하곤 하지만 여전히 남는 의문은 그 불러온 시간이 왜 갱신된 사진의 시간일 수는 없는가 하는 것이다. 사진의 시간은 어쨌거나 기계의 시간이기 때문에 때로는 사진가의 존재를 위태롭게 할 만큼 자기 파괴적인 시도로 이어져 왔는데, 회화는 그런 아슬아슬한 사진의 시간을 빌려올 수는 없는 것일까? 사진이 회화에게 동시대 미술관의 인류학 유물 같은 존재로 머물 이유가 없다면 회화의 사진 참고문헌은 여전히 업데이트를 요한다.
--- p.146 안소현(아트 스페이스 풀 디렉터), 「회화 속 사진적 시간」 중에서
이미지 자체를 제외하고, 사진에서 읽어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정보는 아마 시간일 것이다. 우리는 사진이 필연적으로 그것이 촬영된 순간에서부터 끊임없이 과거로 떠내려간다는 걸 안다. 그렇다면 사진 속 이미지만 보고 언제 찍힌 것인지, 그러니까 얼마나 과거로 밀려난 사진인지 판독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리고 그 방식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 p.149 이기원(사진 비평가), 「타임라인 위에서의 사진」 중에서
무엇보다 내가 이 사진집에 끌리는 이유는 이미지의 할애다. 레스(RES)는 비판하려는 트럼프 위주의 이미지보단 세상과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내고 싶었던 어머니의 모습에 중점을 두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국내에도 트럼프를 조명하는 도서가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덴 트럼프의 정신장애를 진단하는 정신의학적·심리학적 진단서도 일정한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책들이 트럼프에게 ‘정신 장애를 겪고 있는 대통령’이라는 또 다른 캐릭터를 부여하는 데만 복무한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
--- p.160 김신식(감정사회학 연구자), 「나의 서른할 살」 중에서
‘시공’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받아들여지면서 태어난 단어다. ‘시간 및 공간’이라는 평범한 뜻의 축약어처럼 보여서 자주 오해를 사는 이 단어는 실제로는 시간과 공간이 통합된 물리적 환경을 뜻한다. ‘시간과 공간’이 아니라 ‘시-공-간’이다. (...) 그러니까 시간은 물리적 환경에 따라 빨라지거나 느려지거나 멈추거나 역행하거나 도약할 수 있다. 불변하는 시간 속에 영영 사로잡힌 줄만 알았던 인간들은 이 새로운 상식을 받아들이면서 다양한 종류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이어질 도서 목록은 그 꿈의 목록에 가깝다. 이 꿈들 중 일부는 현실이 되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될 예정이다.
--- p.163 최원호(출판 편집자), 「시간여행의 이해를 돕는 과학/소설 읽기」 중에서
인간은 여러 가지 형태의 세계상을 만들고 그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는데, 그것이 언제나 투시도법적으로 조망되는 삼차원 공간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때로 화가가 만든 평평하게 물결치는 공간에 잠기기도 하고, 필자와 그래픽 디자이너 가 구축한 평평하고 복잡한 구조의 정보 공간에 머물기도 한다. 이 평면들은 단순히 납작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정신적인 것도 아니지만 나름의 규칙에 따라 세계를 담는다. 김경태는 사진을 통해 이런 재현의 평면을 구성하는 방법을 탐구하며, 이는 세계를 다르게 보고 새롭게 지어 올리려는 시도와 맞닿아 있다.
--- p.235 윤원화(시각문화연구자), 「김경태: 비(非)투시도법적 종합」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