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는 주체가 디지털 기술을 통해 자기 자신 그리고 세상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 지금 이 시기를 우리는 셀피 단계라고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실제로 변한 것은 세상이라기보다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다. 그런데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변한 까닭은 도처에 퍼져 있는 전화·화면·카메라·컴퓨터를 겸비한 이 하이브리드 물건, ‘똑똑하다’고 여겨 우리가 ‘스마트폰’이라고 부르는 이 물건이 세상과 우리 사이에 개입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라는 이 신기한 물건은 타인과 우리, 우리가 실제로 느끼는 것과 우리가 겉으로 보여 주는 것, 나와 너 사이의 연결고리가 되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스마트폰이 결국 하나의 화면이라는 점, 다시 말해서 이미지를 생산한다는 점, 그래서 나의 일부를 보여 주는 물건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자. 스마트폰이 개인과 개인 간에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은 어느 선까지일까?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나란 어떤 나인가? 그리고 그런 나에 대해 대체 무엇을 말해 주는 걸까?
-pp.13∼14 “들어가기”
그러나 오늘날 언어는 더 이상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리얼리티의 근거가 되는 것은 언어로 세워진 바벨탑이 아니라, 이미지라는 새로운 우상을 섬기는 덧없는 제단이다. 언어는 이제 ‘퇴물’이 된 반면, 이미지는 무한 증식된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올린 셀피 사진이든 아니면 거의 순간적으로 증발되는 스냅챗 사진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세계는 이제 사진으로 ‘기록된다.’ 긴 담론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단번의 눈길, 첫눈에 포착되어 수백만 화소로 고정되는 스냅사진이 삶과 죽음, 감정과 감동에 대해 말한다. 감정과 관련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정형화된 여러 감정 중에서 하나를 골라내는 정도다. 고대 그리스 이래로 지속되어 온 합리적 담론 로고스logosλ?γο?에 기반을 둔 세계관을 밀어내고, ‘휘발성 이미지’의 사회가 우위에 서게 된 것이다. -p.57, “2장 인간 혁명-세상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의 변화”
이처럼 셀피 단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혼종 주체성, 가상 주체성의 형성이다. 이것은 실재 주체와 그의 아바타 사이의 긴장 상태에서 자기 확신에 어려움을 느끼는 주체성, 주체 없는 주체성의 한 형태다. 이 셀피 단계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주체성의 완전한 변모가 일어나는 어떤 계기다. 실재 체험과 그것에 대한 가상적 재현 사이에서 끝임 없이 자문하는 자아와 마찬가지다. 이런 긴장은 과도기의 표현이다. 문제는 이 새로운 형태의 자아, 가상에 의해 관통되고 변모된 이 새로운 자아의 종착점이 과연 어디인가를 아는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증강 현실’과 ‘증강 인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제 ‘증강 주체성’을 언급해야 하지 않을까? 증강 주체성이란 주체 형성 과정 자체에 가상이 결합되어 형성된 주체성을 뜻한다. 지금으로서는 이 변모의 시간이 여전히 불편하고 고통스럽고 어려운 순간으로 남아 있다. 이따금 사는 게 고달프고, 존재하는 것 자체가 힘들고, 스스로에 대해 확신하기 어렵고, 많은 불안을 극복해야 한다고 느끼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pp.88∼89, “3장 자아 혁명-자아의 변화와 가상 주체성의 등장”
하지만 인정은 언제나 교환의 상호성, 즉 나와 너 사이에 편재하는 관계를 전제로 한다. 그런데 가상 세계는 대개의 경우 소통 없는 교환, 언어 없는 이미지다. 덧없음과 (재화, 사물, 사람의) 과소비, 무절제한 조급증과 근거 없는 행동,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환상과 자유의지의 붕괴, 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우리는 아무런 확신도 없이 실존한다. 실존한다는 사실 자체 안에서 안도감을 느끼려는 욕구, 현사실성과 연루된 의심에서 벗어날 필요성을 늘 느끼면서 말이다.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셀피 뒤에는 비극 배우의 가면을 쓴 우리의 모습이 감춰져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인정 욕구를 충족시키려 끊임없이 애쓰다가 결국 타자와 편향된 관계를 맺고 만다. 우리는 끊임없이 묻는다. “셀피야, 셀피야.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페이스북 친구들아, 페이스북 친구들아. ‘좋아요’를 최대한 눌러 오늘 아침에 내가 정말 존재한다는 걸 알려주렴.” 그런데 이런 인정 욕구로 인해 우리는 자유를 잃어버렸다. 누군가의 마음에 들려 애쓰지 않고, 누군가를 실망시키거나 거절당할까봐 혹은 연극 무대에서 쫓겨나듯 ‘싫어요’의 대상이 될까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롭게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는 자유를.
-p.122, “4장 사회·문화 혁명-화면으로 만나는 타자”
가상 세계에 몰입함으로써 우리는 ‘보다’ 인간적이고 ‘보다’ 진실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느낌을 갖게 되었다. 실재와 가상의 대립은 거기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이 두 현실을 대립시키는 것은 그다지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이 지성의 세계와 감각의 세계를 구분했지만 결국 이 둘이 하나의 세계임을 상기시킨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현실에서 가상의 부가 정보를 내려 받는 증강 현실의 시대임을 수긍하고, 이 두 현실을 동시에 수용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서서히 변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물리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정신적·개인적·문화적 차원 등등에서 이런 변모가 우리를 불안하게 하든 아니면 혼란스럽거나 두렵게 하든, 우리의 관심을 끌든 우리를 매혹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본질적인 것은 일단 이 변모를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타자와 현실적이고 깊은 관계를 ‘상실’했다는 느낌이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 번 관계를 되돌아보고 재정립하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그런 상실감이 현실적인 것이든 단지 해석의 문제에 불과한 것이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pp.202∼203, “8장 윤리 혁명-여러 아바타 속의 자아”
나는 이 책에서 신기술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이 기술들이 세계를 이해하는 우리의 방식에 미친 급격한 변화에 대해 설명하고자 했다. 나는 ‘셀피’?이 급격한 변화에서 비롯된 주체성 위기와 가상 자아의 존재를 보여 주는 에고의 초상화?가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 또한 나는 우리가 가상 세계를 두려워하는 대신 그것을 우리의 일상 속에 완전하게 통합해 냄으로써, 그리고 이 ‘가상의 나’를 ‘실재의 나’와 연계시킬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르네상스의 토대를 닦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싶었다.
탈주체화되는 느낌에 맞서 내가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주체의 재주체화 가능성, 즉 도덕적 주체가 자신의 내면을 다시 제 것으로 삼아 그를 혼란에 빠트렸던 의미를 되찾고, 또 무엇보다도 주체가 다시 자유의 가능성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이다.
-pp.219∼220, “결론: 끝은 시작일 뿐”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