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를 졸업했고 25년을 교회 신문에서 일했으니 평생 교회의 녹을 먹고 산 셈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 속에서의 삶과 교회 안에서의 생활이 하나를 이루지 못함은 정성과 노력, 신앙의 투철함이 부족한 탓임을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가려 뽑은 글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 일상과 세상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연결되는 접점을 찾아보려고 애쓴 흔적들입니다. 평범한 일상사들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 ‘책을 펴내며’ 중에서
하나를 가지면 둘을 갖고 싶고, 아홉을 가지면 열을 채우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긴 하지만, 텃밭 일구는 일에까지 이리 욕심이 나대서야 어디 되겠는가. 채소들에게, 적당히 숨 쉬는 공간을 틔워 주고, 적당히 목이 말라서 뿌리를 길게 뻗는 법도 익히도록 해주는 일은 채소에게만 아니라, 나에게도 삶의 지혜를 일궈주는 일인 듯하다. 어쩌면 이겨낼 법한 수난과 염려, 적당한 갈증과 허기로 우리가 깊고 넓게 뿌리를 뻗도록 하는 것이 씨를 뿌리시고 텃밭을 일구시는 하느님의 손길인 듯도 싶다.
- ‘다시 옥상 텃밭으로’ 중에서
증거는 굳이 거창할 필요가 없다. 자기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서 쓰레기 한 점 줍는 일, 이웃과 불화하지 않고 평화롭게 사는 것, 주변에 있는 소년소녀가장에게 반찬 한 가지 해주는 것, 선거하는 날 놀러가지 않고 꼭 투표하는 것, 온 가족이 나란히 손잡고 성당 가는 것, 부동산 투기를 하지 않고 성실하게 일해서 돈 버는 것.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 정도가 어렵다 하면 성당 가지 마라.
- ‘복음 선포와 삶의 증거’ 중에서
긴장이란 실패의 두려움, 자존심과 긍지에 대해 상처를 입지 않을까 하는데서 비롯된다.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해 겸허한 마음가짐을 가진 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진인사(盡人事)’의 자세일 것이다. 나아가 스스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을 때에는 더 이상 허욕을 부리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의탁하는 것, 그것이 ‘대천명(待天命)’의 자세이다.
- ‘긴장과 이완의 미학’ 중에서
우리가 이웃을 보는 눈길은 하느님을 닮아야 한다. 정의의 하느님께서는 ‘죄 많은 이 나라’에 눈길을 주시어 멸망에 떨어뜨리기도 하실 것이지만(아모 9, 8), 자비이신 하느님께서는 ‘어진 눈길을 지닌 이’(잠언 22,9)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이 잘되게’ 하고 ‘그들을 이 땅으로 돌아오게’ 눈길을 주신다.(예레 24,6 )
- ‘네 이웃을 흘기지 마라’ 중에서
신앙인이 보이는 이율배반적인 삶의 태도와 가치, 신앙이 가르치는 바를 때로는 ‘로맨스’, 때로는 ‘불륜’으로, 이중적으로 이해하는 그런 사람이라면, 차라리 신앙이 없는 이가 자기 확신에 따라 멋대로 사는 것보다도 못한 것은 아닐지? 온갖 죄 중에 거짓됨과 위선의 죄만은 면제받을 수 있을 테니까. -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중에서
구원이 땅에서 오든 하늘에서 오든 그건 결국 인간의 개념이다. 애당초 구원은 우리 곁에 놓여 있었고, 하늘이나 땅 어디로부터도 다가올 수 있다. 우리는 고통과 좌절, 배신감 속에서 몸부림치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구원을 발견한다.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혼란과 고통의 시간을 지나서야 드러나는 구원과 해방. 그리고 고통과 절망 그 자체가 구원으로 가는 여정이라는 깨달음, 그 여정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다.
- ‘은밀한 햇볕 같은 구원’ 중에서
교회는 그 울타리 안에서 재화의 많고 적음으로 하느님 백성들이 차별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중산층화 됐다는 명백한 증거들이 여러 조사들을 통해 나오고 있다. 교회가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여력이 늘어난다는 점에서야 나쁜 일은 아니지만, 가난한 이들의 자리가 줄어들고 있다는 점에서는 치명적이다.
- ‘쩐의 전쟁’ 중에서
교회가, 구체적으로 교회 당국이, 통절한 자기반성으로 시작하지 않고, 혹은 그것이 결여되거나 거기에 소홀한 채, 백성들에게 세속과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신앙이 강건하기를 촉구할 때, 조금은 설득력이나 효율성이 떨어질 수도 있다.
- ‘신앙의 해를 성찰하는 또 다른 방법’ 중에서
너무 편안해진 교회, 너무 안락한 교회가 과연 참으로 평화로운 교회일까 하는 생각이다. 밑에서는 물이 뒤집어질 조짐을 보이고 있는데, 혹시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뒤집어지고 나서야 알아차리는 것이 좋은 일일까? 사실 뒤집어져야만 아는 것이 인간의 일이 아닐까? 라는 식의 우려와 근심을 사실 많은 이들이 하고 있기는 하다.
- ‘물이 다 뒤집어졌네’ 중에서
원죄로 인한 죄의식과 의무적인 기도, 형식적이고 지루한 전례, 알듯 모를 듯 한 교리와 성경 말씀만으로는 신바람이 안 난다. 게다가 권위적 사제, 거만하고 산만한 수도자, 옆 사람에 무관심하고 불친절하며 냉랭한 신자들이라면 갈수록 태산이다. 온갖 좋은 말은 다 하지만 정작 저희들은 말하는 걸 지키지도 않는다. 교회는 무엇으로 사람들에게 재미를 줄까?
- ‘재미난 세상, 재미없는 교회’ 중에서
한국교회 평신도들이 성직주의를 비판할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과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 핵심은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 공동체에 대한 이상이다. 이는 수직적 계층 구조가 아니라, 사랑과 상호존중에 기반을 둔 수평적 관계가 특징이다. 성직주의의 극복이 결국은 성직 계층으로부터 시작되고 마무리될 것이겠지만, 이를 함께 앞당길 상당한 책임은 평신도 스스로에게 있다. 그런 점에서 현재 한국교회의 평신도들에게 유감이다.
- ‘평신도 유감’ 중에서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