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나 공학자가 아닌 시민들에게 과학이 왜 필요한지 진지하게 되물어야 할 때가 되었다. 전문가가 아니라면, 그리고 지식 생산과정에 직접 관여하는 입장이 아니라면 굳이 시민들이 과학지식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고, 누구도 어떤 기준을 강요할 수 없다. (…) 시민들은 직접 연구를 하고 지식을 생산하는 의무를 부여받지 않았으며, 그 결과물을 완벽히 이해할 의무 또한 없다. 그것은 과학자의 일이다. 그렇다면 과학, 과학기술, 혹은 공학에 대해 시민으로서 알아야 할 무언가가 따로 있을까? 우리는 지금부터, ‘반드시’까지는 아니지만,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지켜나갈 때 알면 좋을 과학기술을 ‘과학기술정책’(Science Technology Policy)이라는 렌즈를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들어가며」중에서
기초과학이라는 개념이 한국 과학기술정책에 유의미한 영향을 주지 못했던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 존재감이 대단했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국의 성공 신화에서 과학기술 부문은 주로 산업계에 빠르게 적용될 수 있는 기술의 개발연구에 치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66년 설립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대표적 사례다. 정부의 입장에서 KIST는 한국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상징하는 기관이 되어야 했다.
---「1장 기초과학은 중요하다(?)」중에서
이른바 두뇌 유출이라는 현상은 굳이 말하자면 모든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다. 연구자들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석하기보다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해석해보면 조금 다른 현실을 마주할 수 있다. 연구자들이 떠도는 것은 한국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측면이 분명 어느 정도는 있겠지만, 동시에 세계적인 인력 이동 현상의 일부다. 이 거대한 흐름에 한국이 국가 수준의 개입을 하고 싶다면 두뇌 유출을 부르짖기보다는 큰 흐름 속의 지류들을 한국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을 고민하거나, 한국을 어떻게 큰 흐름의 유리한 길목에 위치시킬지 고민하는 것이 새로운 답을 찾는 힌트가 될지 모른다.
---「4장 떠돌이 계약 노동자」중에서
테크노사이언스는 과학지식 생산 과정을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요소들이 만드는 하나의 거대한 순환고리로 이해한다. 돈, 노동력, 실험기구, 실험대상, 논쟁, 국가 규제 등등이 복잡하게 얽힌 영향관계 속에서 과학지식이 생산된다. 간단히 말해 오늘날 과학은 테크노사이언스다! 과학과 기술의 관계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도 없고, 국가와 과학, 연구실과 시장, 연구자와 시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5장 연구지원정책」중에서
과학기술계에서 여성 과학자를 다루는 방식 중 하나는 영웅 신화의 서사와 거의 흡사하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대한 여성 과학자 혹은 현재 세계적 위상에 올라선 여성과학자의 삶을 조명하며 이들을 ‘유리천장을 깬 위인’으로 치켜세우는 장면을 흔히 마주친다. 여성의 성공담을 다루는 이런 뻔한 레퍼토리가 여성 과학기술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다. 한데, 혹시 우리는 이런 성공담에 너무 식상해진 나머지, 정작 중요한 것을 간과한 건 아닐까? 이를테면 과연 그 영웅은 ‘결혼을 했을까?’, ‘아이도 있을까?’, ‘육아나 가사를 도와준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을까?’ 같은 이야기들, 제 아무리 영웅이라도 비켜갈 수 없는 생활인으로서의 현실들 말이다.
---「6장 과학기술과 여성」중에서
SF가 왜 중요한 장르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창의력의 발현이나 상상의 가치를 언급하곤 한다. 좋은 이야기이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SF의 가치를 이야기해볼 수 있게 되었다. SF는 그 어떤 매체보다, 그 어떤 표현양식보다도 현실 속의 과학기술이 작동하는 기제를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등장하는 지식과 기술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그리고 존재하게 될지 알 수 없는-것들이지만, 과학기술에 개입하는 온갖 다양한 사람들의 존재, 그들의 정체성과 생각, 이들이 얽혀 만들어내는 갈등, 이 갈등을 중재하고 해소하려는 제도와 문화의 작동 방식 등을 하나의 서사 안에 모두 녹여내는 극-사실적 장르라고 말하고 싶다.
---「9장 사이언스 픽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