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학생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만약 우리가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면… 왜 아직도 원숭이가 존재하는 거죠?” 그는 정중하면서도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극적 효과를 노리기 위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어갔다. 나도 맞받아 미소를 지어주었다. 청중 중에서 몇 명도 같이 웃었다. 웃은 사람들은 대부분 교수들이었다. 하지만 잠깐 웃음소리가 있은 후 대부분의 청중은 조용히 입을 닫고 귀를 곤두세웠다.
나는 그 질문에 대한 과학적인 답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그 학생에게 그 대답을 해줄까 생각했다. 진화론은 우리가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거나, 오늘날 살아 있는 어떤 다른 생명체로부터 진화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증거를 보면 우리는 원숭이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와 공통의 선조를 공유한다. 하지만 이 학생은 자기가 이 ‘진화론자’를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확신하고 있는 듯 보였기 때문에 조금 장난을 쳐볼까 싶어 오랜 시간 동안 나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원숭이’ 질문에 사용했던 반응을 써먹기로 했다.
“그 대답은 잠시 후에 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제가 질문을 하나 드리지요. 개신교는 어디서 왔을까요?”
“뭐라구요?” 그 학생이 중얼거리기는 했는데 거의 들리지는 않았다. 아직도 미소를 짓고는 있었지만 그 기세가 살짝 꺾였다.
“아니, 진지하게 하는 질문입니다. 개신교는 어디서 왔을까요?” 내가 다시 물어보았다. 그 학생이 망설이자 나는 살짝 도움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마르틴 루터, 교회 정문에 붙여놓은 95개조 의견서, 종교개혁, 이런 내용들 알죠? 과제에 다 나왔던 거잖아요.”
“가톨릭에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그 학생은 이렇게 대답하면서도 내가 왜 그 질문을 던졌는지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때의 가톨릭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까?” 내가 대답했다. 이제야 그 학생은 내 말의 요지를 이해한 것 같았다. 강의실 안에 미소와 웃음이 퍼지는 것을 보면 청중도 이해한 것 같았다. “그 후로 기독교 교회는 두 개의 큰 가지로 나뉘었고, 그 둘을 오늘날에는 가톨릭과 개신교로 부르죠.” 나는 염치없이 종교의 역사를 이렇게 지나치게 단순화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거기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알아들었으니까.
“영장류의 진화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의 원숭이로 이어진 가지가 몇천만 년 전에 유인원으로 이어지는 가지와 갈라져 나왔고, 우리 인간도 그 유인원 중 하나죠.” 그 학생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분명 내 대답에 실망한 눈치였다. 어쩌면 내가 대답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실망했는지도 모르겠다. --- p.54~55
이런 사고방식이 계속 이어지면 진화는 전적으로 자연의 힘, 생명체와 비생명체에 똑같이 적용되는 원칙에 휘둘리는 것이 된다.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가 말했듯이 과학이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에 아무런 목적도 담겨 있지 않음”을 밝힌 것이라면 분명 진화 과정 자체에도 아무런 목적이 담겨 있지 않다는 의미가 된다. 현대의 복잡하고 합리적인 세상에서 이런 진화적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인간을 특별할 것이 전혀 없는 존재로 여긴다. 이런 사람들은 인간을 아무런 중요성도 없는 우주적 우연으로 여기고, 인간의 예술과 창조성은 자연선택이 만들어낸 무의미한 부산물로 묘사하고, 목적, 자아, 심지어는 의식까지도 아무런 의미 없는 화학적 환상에 불과한 것이라 여긴다. 요약하면 이들은 암울하게도 우리 인간이 만물의 숭고한 계획 안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관점을 받아들인다. 이런 이야기를 지어낸 사람들에 따르면 인간의 진화 이야기는 무의미한 우연, 암울한 투쟁, 그리고 궁극의 허무로 점철된 이야기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이런 나쁜 소식에 귀를 닫고 싶었던 것도 당연하다. --- p.10~11
우리는 동물계에서 인간의 위치가 아주 높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생물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 영장류는 무성하게 자라난 거목의 한 작은 가지에 불과할 수도 있다. 역사적 측면에서 바라보면 인간이 등장한 것은 불과 최근의 일이다. 지구 위에 나중에 가서 덧붙여진 존재에 불과하다. 자연사 전체를 우리 종을 탄생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 과정으로 바라보는 것은 무모한 일이 될 것이다. 천문학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주의 목적이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라면 이 문제에 관한 한 우주는 민망할 정도로 비효율적이다. 그리고 우주의 추가적인 목적이 생명을 위한 비옥한 요람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우리의 우주적 환경은 그것을 참 이상한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지구 위의 생명은 35억 년 넘게 존재하는 동안 대재앙과 죽음, 파괴를 야기하는 자연재해에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받아왔다. 화산, 지진, 기후 변화, 쓰나미, 폭풍우, 특히 살인 소행성으로 인해 야기된 생태적 파괴로 인해 지금까지 이곳에 존재했던 모든 생물종 중 99.99퍼센트가 멸종하고 말았다. --- p.40
19세기에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생명의 나무 꼭대기에 의기양양하게 올라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미술 작품을 통해 진화와 관련된 암울한 뉴스가 조금은 완화되는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림 중 하나가 1874년에 독일의 동물학자 에른스트 헤켈에 의해 그려져 그의 책 『인류의 기원(Anthropogenie)』에 등장했다. 헤켈의 그림은 인간이 생명의 사다리를 직선으로 올라가 생긴 결과라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위치가 생명체의 최정상에 있다는 것은 확실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연히 헤켈은 20세기와 21세기에 풍부하게 발견될 인류 이전 화석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 결과 그는 앞서서 린네가 시도했던 것처럼 인간(‘Menschen’)을 진화 다양성의 가장 높은 가지가 받쳐주는 성공과 지배의 위치에 올려놓았다(그림 3-1).
생명의 나무를 헤켈이 정의한 방식으로 상상하며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 여전히 많겠지만 요즘에 그리는 그림은 그와는 사뭇 다르다. 생물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떤 종은 더 높고, 어떤 종은 낮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수다. 모든 현존 생물종은 똑같은 진화 과정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연필 끝에 묻어 있는 세균은 당신만큼이나 진화되어 있는 존재다. 물론 이 세균은 우리와는 상당히 다른 생활방식을 찾아낸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세균을 생명의 나무 바닥으로 끌어내리거나 우리를 그 정상으로 끌어올려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럼 점에서 보면 생명체들 사이의 진화적 상관관계를 강조해서 더욱 정확하게 이 나무를 그리면 다음과 같이 보일 것이다(그림 3-2).
이 현대판 생명의 가계도는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들의 단일 기원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구축됐다. 한 생명체가 가지치기를 거듭하며 외곽 가장자리에서 일련의 집단들을 형성했다는 개념이다. 여기서의 차이점은 생명의 나무 꼭대기를 차지하거나 바닥을 차지하는 현존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간은 포유류에 포함되어 있다(도표에서 화살표 부분). 이 도표를 더 자세히 그린다면 포유류 자체도 수십 개의 동등한 가지로 나뉘고, 그 각각의 가지들이 현존하는 단일 생명체를 대표하며 제일 외곽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어느 가지가 더 특별하다거나, 특권이 있다거나, 지배적이라거나,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라 여길 아무런 과학적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의 가지라 해도 말이다. --- p.113~116
최고의 희곡 중 하나인 『햄릿』에서 햄릿은 우리 종을 “이성에서 고귀하고”, “능력에서 무한한” 존재이며 한낱 동물이 아니라 “세상의 아름다움이며, 동물들의 귀감”이라 표현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이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인간이 한낱 먼지 덩어리로만 보이니, 이 먼지 덩어리의 전형(quintessence)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별것 아니었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에 따르면 기쁨을 주는 것은 분명 아니었다. 물론 햄릿은 아주 일진 사나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고 거기서 더 안 좋아지려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그가 기분이 안 좋았던 것도 이해할 만하다. 내가 열정 없던 고등학생 시절에 『햄릿』을 처음 읽었을 때는 그 ‘전형(quintessence)’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 전에도 ‘quintessential(전형적인)’이라는 용어를 여러 번 들어봤기 때문이다. 우리 마을의 스너피즈(Snuffy’s)는 ‘전형적인’ 스테이크 집이었고, 미키 맨틀(Mickey Mantle)은 ‘전형적인’ 강타자였고, 메릴린 먼로는 ‘전형적인’ 영화 스타였다.
전형적인 사물은 그 종류에서 가장 순수하고 완벽한 본질(essence)이다. 전형적인 사람은 자신의 기술이나 재주에서 완벽함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햄릿이 말한 ‘전형’은 우리가 성경의 말을 빌면 먼지로부터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먼지로부터 나올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존재라는 의미일 것이라 추론했다. 하지만 훨씬 뒤늦게 나는 ‘quintessence(전형)’에 좀 더 미묘한 함축적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2년이나 라틴어를 공부하느라고 그 고생을 했으니 ‘quint’라는 접두사가 ‘다섯 번째(fifth)’를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했음을 눈치 챘어야 했다. 따라서 이 단어의 의미는 ‘다섯 번째 본질(fifth essence)’이다. 고전적 서구 사상에서 물질계(physical world)는 네 가지 원소(element) 혹은 본질(essence)로 구성되어 있었다. 바로 불, 흙, 공기, 물이다. 하지만 정신의 본체(substance of mind), 존재의 영적 본질을 설명하려면 다섯 번째 요소가 필요했다. 한낱 물질에 불과한 네 가지 요소만으로는 인간의 본성이 갖고 있는 ‘무한한 능력’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햄릿은 셰익스피어의 도발적인 언어로 이런 믿음을 인정했지만, 나중에 묘지에서 이런 믿음을 조롱한다. 알렉산더가 죽고, 알렉산더가 땅에 묻히고, 알렉산더가 먼지로 돌아갔다. 먼지는 흙이다. 우리는 그 흙으로 반죽을 만든다. 그 반죽으로 맥주통 마개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은가?
햄릿이 냉혹하게 지적한 대로 죽음은 경이로운 전형을 가장 시시한 존재인 흙으로 격하시키고 만다. ‘동물의 귀감’이란 소리는 이것으로 끝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셰익스피어는 이것을 이해하고 있었고 자신의 가장 인상적인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이것을 독자들에게 생각할 거리로 던져주었다. 이런 햄릿의 말에도 불구하고 인간 정체성의 본질을 물질로 보는 개념에 대한 거부감이 계속되고 있고 이런 거부감이 진화론에 대한 저항을 야기하는 뿌리 중 하나다. 프랜시스 크릭이 ‘놀라운 가설(astonishing hypothesis)’이라고 부른 것을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볼 것이다.
‘당신’, 당신의 기쁨과 슬픔, 당신의 기억과 야망, 당신이 느끼는 개인적 정체성과 자유의지, 이런 것들이 모두 사실은 신경세포와 그 관련 분자들의 거대한 집합이 보이는 행동에 불과하다. 루이스 캐럴의 앨리스라면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너는 신경세포 꾸러미에 불과해.” 이 가설은 오늘날 살아 있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너무 낯선 개념이기 때문에 진정 놀라운 가설이라 할 것이다.
--- p.344~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