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석에 환하게 불이 밝혀진 순간, 지환은 제 눈을 의심했다. 맨 앞줄에 앉아서 열렬히 박수를 치고 있는 화려한 미모의 여자.
바로 민효령이 아닌가!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분명 그녀가 틀림없었다. 무대인사를 어떻게 끝냈는지 모르겠다. 관객에게 와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하면서도, 재미있으셨냐고 물으면서도 오로지 지환의 눈에는 민효령밖에 보이지 않았다.
물론 지환의 눈에만 그랬을 뿐, 사실은 그녀 외에도 여러 연예인과 유명인사들이 축하를 위해 자리하고 있었다. 무대인사가 모두 끝나고 관객들이 뒷문으로 나갈 때 VIP들은 주연배우들과 직접 인사를 나누고 나서 함께 앞문으로 퇴장했다. 민효령 역시 마찬가지였다. 매니저와 함께 주차장으로 향하려는 그녀를 재빨리 따라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붙잡았다.
“저, 선배님.”
뒤에서 부르자 새하얀 폭스 재킷을 걸친 작은 어깨가 놀란 듯이 흠칫 굳어졌다. 그녀는 돌아서서 어색한 얼굴로 지환을 마주했다.
“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진짜로 와주실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요.”
민효령은 지환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조그맣게 말했다.
“초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영화 정말 재미있었어요.”
왠지 수줍어하는 것같이도 보였다. 물론 알고 있다. 천하의 민효령이 새파란 신인배우에 불과한 제 앞에서 수줍음을 탈 리 없다는 것을. 그렇지만 최소한 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지난번과는 사뭇 다른 태도에 용기가 나서 그랬을까. 저도 모르게 불쑥 대담한 말이 튀어나왔다.
“여기까지 와주셨는데 제가 차 한잔 대접해도 되겠습니까?”
사실 같이 출연한 배우들과 회식이 예정되어 있지만 아무래도 이대로 보내기는 싫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곤란해하는 빛이 떠올랐다. 거절당할 것 같은 느낌에 지환은 끈질기게 말했다.
“시간 오래 빼앗지 않겠습니다. 딱 삼십 분 정도면 됩니다.”
저만치에 서 있는 매니저의 눈치를 슬쩍 보고 나서 민효령은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네.”
다행히도 근처 카페에는 사람이 드물었다. 마주 앉아 있는 상대를, 지환은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는 심정으로 쳐다보았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는 커다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잘 느끼지 못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제대로 보니 역시나 대단한 미인이었다.
작은 얼굴 안에 용케 자리 잡고 있는 눈, 코, 입 하나하나의 모양이 모두 완벽하게 아름다웠다.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의 커다란 눈과 완벽한 브이라인을 그리는 턱 때문에 전체적으로 도도한 고양이 같은 인상을 주었다.
치장 역시 화려했다. 짙은 화장에 헤어스타일도 완벽했다. 화려한 폭스 재킷 안에는 반짝이는 재질의 검정색 원피스를 입고, 작은 귓불에는 커다란 크리스털 귀걸이가 빛나고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톱스타다운 모습.
단 하나, 겉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녀의 갈색 눈동자였다.
배우로 일하기 시작한 후 여태 수많은 연예인을 보았다. 예의 바른 사람, 안하무인인 사람, 친절한 사람, 유머러스한 사람. 성격이야 모두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을 모두 아우르는 공통점이 한 가지 있다면 바로 눈이었다. 독기라고도 부를 수 있을 만큼 강한 눈빛. 그런데 톱스타인 민효령의 눈에는 전혀 그런 기운이 없었다. 그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을 뿐.
“고맙습니다.”
민효령은 차를 가져온 종업원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주문을 받으러 왔을 때도 고맙다고 인사했던 것 같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그녀의 이미지는 좀 지나칠 정도로 도도한 쪽이었다. 사석에서 팬들을 마주쳤을 때 절대 사인요청에 응해주지 않는 걸로도 유명했다. 워낙 본업인 연기를 잘하는 데다 톱스타니까 대중들도 원래 그런 캐릭터려니 하고 이해하는 편이었지만, 거만하다고 싫어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지환 역시 민효령의 성격에 대해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지난번에 미용실에서 마주쳐서 인사했을 때도 생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거만함이 몸에 밴 듯한 느낌이랄까. 그런데 이제 보니까 무척 예의가 바르지 않은가. 다소곳이 다리를 모으고 앉아서 조심스럽게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드는 그녀를 보며 지환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영화, 어떠셨습니까?”
“……좋았어요.”
여전히 민효령은 눈을 내리깐 채, 지환을 보지 않고 대답했다.
“한참 부족한 연기를 선배님께 보여드려서 부끄럽습니다. 열심히 한다고는 했는데 같이 출연한 다른 선배님들께도 괜히 폐가 되지 않았을까 걱정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반쯤은 겸손을 떠느라 한 말인데, 갑자기 민효령이 정색하며 커피잔을 내려놓고 똑바로 쳐다보는 바람에 지환은 깜짝 놀랐다.
“이번에 같이 연기하신 분들 모두 베테랑이잖아요. 신인이 어떻게 처음부터 그분들과 똑같이 연기해내겠어요? 아직 서투른 면이 있는 건 당연한 거지요.”
뺨을 조금 붉히고 민효령은 열심히 말했다.
“지환 씨의 연기에는 분명히 진정성이 있어요. 이번 작품에서의 연기도 정말 좋았어요. 비슷한 역할이었던 ‘인형의 집’보다 훨씬 더요.”
지환은 조금 놀랐다.
“선배님이 그 작품을 보셨습니까?”
“아, 네. 어쩌다 우연히…….”
그제야 민효령은 당황한 듯 시선을 떨어뜨렸다. 지환은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방금 말한 드라마는 인터넷에서만 방송한 웹드라마인 데다 홍보도 별로 되지 않아서 일부러 찾아보기 전에는 알기 힘든 작품이었다. 그런데 그걸 우연히 봤다고?
어쨌든 미모만큼이나 연기력으로도 인정받고 있는 선배의 칭찬에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어느새 저도 모르게 고민을 털어놓고 있었다.
“좀처럼 비중 있는 역이 들어오지 않아서 고민입니다. 주연을 맡아도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기회가 잘 오지를 않네요.”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지환 씨에게도 곧 좋은 역할이 올 거예요.”
민효령은 마치 제 일처럼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그런 기분이 듭니다. 저 빼고 다른 사람들은 다 날아가고, 또 달려가고 있는데 저 혼자 꾸물꾸물 기어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
지환은 씁쓸하게 웃었다.
“선배님은 처음부터 톱스타셨으니까 모르시겠지만요.”
민효령이 지환을 향해 가까이 다가앉았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지환 씨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약간 상기된 얼굴로 그녀는 열심히 말했다.
“남이 날든지 걷든지 상관할 필요 없어요.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생각해요. 지환 씨는 지환 씨의 속도로 잘 가고 있는 거예요.”
나는 나의 속도로 가고 있다. 그 말이 자격지심으로 가득했던 가슴에 한 줄기 구원처럼 스며들었다.
“지환 씨는 조연으로도 이미 빛나는 사람인걸요. 지금 당장은 답답하겠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역할을 열심히 하고 있으면 언젠가 주연으로 발돋움하게 될 거예요.”
열심히 격려의 말을 하고 있는 민효령을, 지환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기운을 북돋아주려고 애쓰고 있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단순히 선배로서 고민하는 후배를 격려해주는 거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열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럼 선배님, 바쁘실 텐데 이만 일어나시죠. 시간 많이 빼앗아서 죄송합니다.”
커피숍을 나오며 지환은 인사했다.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일부러 시선을 맞추고, 스스로 가장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미소를 떠올린 채 속삭이듯 말하자 민효령은 놀란 듯 황급히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힘내세요. 늘 응원하고 있을게요.”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 역력히 느껴졌다. 이쯤 되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이 여자가 내게 관심이 있는 거 아닐까?
에이, 민효령이 뭐가 아쉬워서 나 같은 신인배우를.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지환은 일단 시험해보기로 했다. 불시에 키스라도 하는 것처럼 얼굴을 확 가까이 가져가서 속삭였다.
“아, 여기 뭐가 묻었네요.”
옷에서 먼지를 떼어주는 척하며 슬쩍 훔쳐본 그녀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지환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민효령이 나를?
하지만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래 봬도 연예인이다. 데뷔하기 전에도 늘 여자에게는 귀찮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자신에게 호감을 품은 여자는 살면서 수백 명, 아니 수천 명도 더 보아왔다. 민효령은 분명 지금 자신을 상대로 수줍음을 타고, 긴장해 있었다.
기쁘다기보다는 얼떨떨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눈앞에 있는 여자는 대한민국 최고의 톱스타였다. 이건 호박이 넝쿨째, 아니 아예 금덩어리가 굴러온 거나 다름없었다.
굴러온 금덩어리는 잡아야지. 지환은 휴대전화를 꺼내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전화 드려도 될까요?”
거절당할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효령은 무척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지환의 휴대전화를 받아들고 전화번호를 입력하는 대신에 손을 뒤로 감추고 한 걸음 물러났다.
“죄송해요. 그럼 먼저 실례할게요.”
뒷걸음질을 치던 그녀는 금세 뒤돌아서서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저만치서 기다리고 있는 매니저를 향해 가기 시작했다.
“선배님?”
당황한 지환이 불렀으나 민효령은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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