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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의미한 살인

유의미한 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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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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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8년 10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336쪽 | 466g | 147*210*30mm
ISBN13 9788984373594
ISBN10 8984373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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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느는 요즘 경찰서에서 일하는 게 좋아지기 시작했다. 건물이 커서 남의 이목을 끌 일도 없고, 적당히 인간적이면서 또 적당히 비인간적이라 저녁이 되면 더 있고 싶어질 일이 없었다. 잔느는 계단을 올라 지원실이 있는 3층으로 향했다. 경찰서의 일원이 된 지도 벌써 1년째다. 하지만 애초에 원했던 방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수사관이나 형사가 되는 건 불가능했다. 다 안경 때문이다. 형사가 되려면 후각이 뛰어나고 눈치가 빨라야지 시력이 탁월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나? 뭐, 이렇게 불공평한 게 어디 한두 가지인가……. 사는 것 자체가 불공평의 연속이니까. 그렇게 잔느는 사무직을 맡게 되었다. 이력 관리, 연월차 및 휴가 관리, 우편물 등 사무 전반에 관한 업무. 수사는 한 발짝 떨어져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나마 특별석이라면 특별석이었다. --- p.12

잔느는 신속히 자기 자리에 앉아 겉옷을 벗어 팔걸이에 걸었다. 그런 다음 바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밀리미터 단위까지 자로 잰 듯 정확하고 규칙적인 손놀림으로 서랍을 열고 파란 볼펜 한 자루, 빨간 볼펜 한 자루, 연필 한 자루, 지우개 하나, 스테이플러 하나, 계산기 하나를 착착 꺼내 책상 위에 나열했다. 핸드백에서 꺼낸 휴대전화의 고정석은 달력 왼쪽이었다. 비록 울리는 일은 없었지만. 열쇠는 휴대전화를 꺼낸 핸드백이 다른 서랍에 들어가고 굳게 잠긴 다음에야 다시 바지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모든 과정을 마치고 잔느는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눌렀다. 동료들이 흥미롭게 지켜보는 가운데 매일 아침 어김없이 반복되는 의식이었다. 잔느와 잔느의 소소한 강박증. 바로 그때, 에스포지토 반장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잔느의 심장이 벌렁거리고 혈관을 돌던 피가 끓어올랐다. --- p.13~14

BB 67400호 기관차는 비어있는 낡은 객차를 뒤에 달고 승강장 안으로 천천히 진입했다. 당연한 일이다. 생 샤를르가 출발역이니까. 초현대식 TGV가 전국을 누비는 시대에 역사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구식 디젤 기관차가 아직도 레일 위를 달리는 모습을 보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문이 열리자 언제나처럼 잔느는 가장 먼저 열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녀의‘지정석’. 마지막 칸, 구석자리. 학교에서도 항상 교실 맨 끝에 있는 구석 자리에 앉았다. 다른 학생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자리. 기차를 탈 때도 항상 그런 자리에 앉았다. 퇴근이 늦어져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때를 제외하고는. --- p.15~16

잔느는 왕래가 빈번한 장소나 다른 직원들과 마주치기 쉬운 시간대는 가능한 한 피해 다녔다. 자신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직원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사람을 피해 다녀도 언제나 자신을 지켜보는 눈에 감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때로는 부검당하는 기분까지 들었다. 그녀는 자판기에 동전을 집어넣고 핫초콜릿을 선택했다. 커피는 가급적 삼갔다. 커피는 그녀를 좀처럼 자리에 앉아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잔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종이컵을 들고 스탠딩 테이블에 기대섰다. 아침부터 경찰서 내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돌았다. 간밤에 ‘놈’이 또다시 범행에 나섰다. 마르세유 일대를 무대로 삼은 ‘놈’은 지난 보름 사이 두 명을 살해하면서 에스포지토 반장을 비롯한 팀원들을 바싹 긴장하게 만들었다. 두 건의 범행 수법이 동일하다고 밝혀지면서 연쇄 살인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지원실 사무직에 불과한 잔느는 이 모든 일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p.22

‘어젯밤, 난 당신이 아닌 다른 여자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와 그리 오랜 시간을 같이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그녀를 죽이는 데 필요한 시간만큼 함께했습니다.’

이번만은 잔느도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편지를 다시 읽어야 했다. 오해했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문자 그대로였다. 그녀가 오해를 한 게 아니었다. 잔느는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같은 문장을 십여 차례 반복해서 읽었다. 단순하면서도 끔찍한 그 단어들을. 편지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저녁 시간, 열차는 에스타크와 니올롱 사이를 지나고 있었다. 하늘보다 파란 지중해가 배경으로 펼쳐졌다. 머리를 조아리고 조용히 기도를 올리는 신자들처럼 거대한 소나무들이 그녀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태양은 점점 수면 아래로 기울었다. 잔느는 편지를 접었다. 주변 시선이 의식되었다. 그녀는 망설였다. 계속 읽어야 할까? 아니다. 하지만 읽고 싶었다. 호기심. 미지의 세계에 대한 낯선 이끌림 때문에. 이 편지가 자신의 삶을 뒤흔들어놓을 거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여자의 이름은 샤를로트 이발디였습니다. 그냥 아무 의미 없는 이름 같겠지만 당신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을 겁니다. 당신은 분명히 그녀를 알고 있습니다…….’

말줄임표가 그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샤를로트 이발디……. 그러고 보니 친숙한 이름은 아니었지만 왠지 낯설지 않은 이름 같기도 한데……. 친구는 분명 아니다. 그녀에겐 친구가 없으니까. 그렇다고 직장 동료의 이름도 아니다. 이웃집 여자는 더더욱 아니다. 설마……. 잔느는 황급히 두 손을 들어 올려 입을 틀어막았다. 공공장소에서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서. 심장이 벌렁거렸다.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는 기차처럼. 똑같은 가속도로, 똑같이 과격하게.
--- p.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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