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함께 어울려 놀던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짝을 찾았다. 이 말은 곧 집에서 규칙적으로 성관계를 갖고, 매일 저녁 여인의 육체에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 나는 그 상황에 빨리 익숙해졌다. 아기를 낳은 이후 구드룬은 그녀의 몸에서 나의 접근이 허용되는 부분을 정해놓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나는 양팔로 그녀의 복부를 얼싸안을 수 없게 되었고, 제왕절개 수술 자국이 난 부분도 만질 수 없게 되었다.
“네 손을 여기 대봐. 아니 그렇게 말고. 그렇게 하고 가만히 있어. 움직이지 말고, 숨도 너무 깊게 쉬지 마.”
구드룬이 그렇게 말하는 바람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구드룬의 양 어깨를 끌어안거나 내 손을 그녀의 흉곽, 그러니까 젖가슴 바로 아래쪽에 얹고 가만히 있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따금씩 금지 사항을 잊어버리고는, 맨살을 더듬어 길을 찾기라도 하듯이, 어느새 손을 복부 아래쪽으로 가져가곤 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구드룬이 물었다.
“아무것도.”
“그럼 내 배 건드리지 마.”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후, 구드룬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님페아는 당신 딸이 아니야. 우리가 이혼하려는 마당이니 만큼, 지금이라도 당신이 그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러고는 한마디 덧붙인다.
“첫 번째 데이트에서 고통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남자는 당신 말고는 본 적이 없어. 당신이 우리는 모두 죽어, 라고 말했을 때, 난 그게 인생을 시작하는 데 괜찮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봤어. 그래서 바로 그 순간에 님페아는 당신 딸이
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지.”
일기장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글에는 날짜가 빠져 있다.
나는 살덩어리다.
그 문장을 끝으로 나는 현실에 대해 논평하는 일을 완전히 그만두었다.
나에게 살덩어리는 머리 아래쪽에 있는 모든 부분을 가리킨다. 살덩어리는 삶에서 제일 중요한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할 때?내가 태어났고, 나의 심장과 허파가 쉬지 않고 계속 움직이니까?한 아기가 태어났으니 나는 나의 살덩어리에서 비롯된 살덩어리에 대해 책임을 져야 마땅하며, 머지않아 내 몸은 더는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엄마가 세상의 이치에 대해 강의하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요나스, 너 그거 아니, 위대한 역사는 우리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이미 시작되었단다.” --- p.80~82
아직도 내가 시도해보고 싶은 무언가가 남아 있을까? 내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발그스름한 핏덩어리인 갓난아기를 품에 안아 보았고, 12월이면 침엽수 숲에서 크리스마스트리로 쓸 전나무를 베어보았으며, 아이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한밤중에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산간도로에서 혼자 타이어도 갈아보았다. 나는 내 딸의 머리를 땋아주었으며, 외국에 갔을 때 빽빽하게 들어선 공장들 때문에 잔뜩 오염된 계곡을 따라 차를 몰아보기도 했고, 몇량 안 되는 작은 기차의 마지막 칸에서 몸이 몹시 흔들리며 달려보았고, 검은 모래로 뒤덮인 사막 한복판에서 가스버너로 감자를 익혀보았으며, 그림자가 때로는 길어졌다가 때로는 짧아지는 곳에서 진실과 드잡이도 해보았다. 인간은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인간은 괴로워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며, 엄지손가락을 가지고 있고, 시를 쓸 줄 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인간은 자신이 죽음을 피하지 못하는 존재임을 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 p.108
‘인격체’로서 그 자신에게 남은 것, 그는 그것을 불확실한 것, 흔히 임의적이면서 더 흔하게는 상당히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는 아주 힘들게 ‘자신’에 대해 생각하며, 어쩌다 용케도 자신에 대해 생각할 때면 실수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혼동하는 경향을 보이며 그의 가장 기초적인 필요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하다. --- p.184
사람들은 죽는다. 다른 사람들 말이다. 누구나 죽는다. ‘누구나’라고 말하면서 나는 사실 나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나는 죽는다. 생명이란 가장 부서지기 쉬운 것이기 때문에. 언젠가 내가 자녀를 갖게 된다면, 그 아이들도 죽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는 이미 그 자리에서 내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고, 그 아이들을 위로해줄 수 없을 것이다. --- p.185
우리가 사는 위도상에서라면, 사람들은 특히 봄철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사람들은 이 세상 만물이 다시 태어나며 그들을 제외한 모든 것이 무에서 새로 출발할 수 있다는 생각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 p.185
나는 이제 신을 믿지 않으며, 신도 더는 나를 믿지 않을까봐 걱정이다. --- p.186
“휴가를 보내려고 이곳을 찾는 사람은 없어요.”
나는 몸을 일으킨다. 나는 침대 이쪽에, 그녀는 침대 저쪽에 서 있다. 그녀는 내가 무얼 하러 여기에 왔는지 알고 싶어 한다. 객실 침대 정리를 도와주는 일 말고 말이다. 만일 우리가, 분홍색 농구화를 신은 이 젊은 여인과 내가 한자리에 앉아 각자의 흉터를, 각자의 절단된 몸을 비교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꿰맨 자국 수를 세어보자는 제안을 한다면, 승리는 단연 그녀 차지가 될 것이다. 내 흉터는 사실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보잘것없으니까. 설사 내 옆구리 전체에 상처가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메이가 이길 것이다.
“특별한 이유 없이 이곳에 오는 사람은 없다니까요.”
그녀가 같은 말을 반복한다.
…솔직히 나 자신도 왜 여기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사실 죽으려고 여기 왔습니다.”
--- p.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