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무엇하는 사람이냐?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닮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은 팔자소관이 같다. 운명 공동체인 것이다. 예수처럼 경천애인에 헌신하다 보면 밑지는 삶을 사는 것 같기도 하고, 고통스럽게 종생하기도 하겠지만, 약간은 바보스러운 그 삶이 실은 부활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고 그리스도인은 나날을 살아간다. ··· 사랑에 젖어야 사랑이신 하느님께로, 사랑의 화신이신 예수께로 반갑게 다가갈 수 있지 않겠나. 이게 천당이지, 천당이 따로 있겠나. 세상에서 늘 비정을 일삼았다면 자기 스스로 하느님, 예수님에게서 물러설 것이다. 이게 지옥이지, 지옥이 따로 있겠나.(15-16쪽)
비판불교에서는 우리의 자아의식에 대한 비판을 추상적인 비판에 한정시키지 않고 사회적 차별의 관습과 직결시킨다. 그것을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자신의 익숙한 세계로서 장소(topos)의 관행’이다. ‘기체’라는 표현이나 ‘장소’라는 표현이 다소 아니 상당히 낯설 수 있지만, ‘기체’는 ‘곧’이라는 말에 의하여 ‘자신의 익숙한 세계로서 장소’라고 풀이되며, ‘자신의 익숙한 세계’가 곧 장소라고 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익숙한 세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여 거스르는 것이 샤캬무니의 불교라고 주장하는 것이 비판불교라고 하겠다. ‘자신의 익숙한 세계’를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성찰해서 타당한 것과 타당하지 않은 것을 가려내는 것이 비판불교인 것이다.(47쪽)
강조하고 싶은 점은 현대 한국 사회에서 관찰되는 유교의 모습이 특수성을 포함하는 지구화의 일부라는 것이다. 지구화를 장기적이고 끝나지 않은 과정으로 본다면, 유교가 그 과정을 역동적으로 만드는 데 참여할 시간은 충분히 남아 있다. 단 유교는 현대사회의 구조와 유교가 처해 있는 현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해야 한다.(89쪽)
융과 다석의 삶과 사상은 동서양의 지리적 간극을 초월한 유사점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융이 평생 목표로 했던 것은 진정한 자기와의 대면이었고 이것은 커다란 자신의 인격변환의 모습으로 드러났으며 다석 또한 평생을 그리스도에 헌신하며 진정한 자신의 내면의 소리와 신의 소리를 듣고자 노력했다. 한 사람은 서양의 정신사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고 또 한 사람은 한국 땅에서 동양의 사유를 바탕으로 한 기독교에 헌신했다.(118쪽)
기존 ‘종교적 경험’ 연구에 대한 비판은 주로 종교학의 ‘과학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여기서 과학이라 함은 아무리 종교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닌 인간의 사회·역사·심리·정치적 산물이기에 각 맥락에서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학문을 말한다. 이는 다른 말로 자연주의(naturalism)적 연구이다. 즉, 초월성에 근거하지 않고 순전히 세계 내적(사회·역사·심리·정치·경제 등) 설명이 가능하고 정당하다는 의미에서 자연주의를 의미한다.(128쪽) ··· 제임스가 ‘경험’을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는 흐름이며 관계들로 파악한 부분은 그의 중요한 학문적 기여이다. 경험의 연속성과 잠재적 자아는 관련이 있고, 이를 통해 종교적 경험을 비롯한 ‘보이지 않는 실재’와의 관계가 설명한 점 역시 제임스의 고유한 통찰이 잘 드러난 부분이다.(138쪽)
‘폭풍신’, 곧 ‘왕바람의 신’이라는 이름은 오직 엔릴에게만 적당한 이름이며, 이쉬쿠르, 하다드, 테슙, 타루, 바알 등을 포함할 수 없는 이름이다. 하지만 오직 ‘풍우신’이야말로 ‘비바람의 신’이라는 이 신의 양면적 성격을 직관적이고도 가장 쉽게 나타낸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독일어 Wettergott과 그에 대응하는 영어 storm god을 우리말 ‘풍우신’으로 옮길 것을 제안하게 되었다.(172쪽)
이신의 초현실주의 신학은 고난과 불의의 현실을 의식과 문화, 역사에게서 읽어내면서, 이 현실을 넘어서는 현실의 대망을 계시이자 로고스로서의 초현실, 다시 말해 메시아와 메시아 왕국에서 찾고 있다. 그렇다면 이신의 초현실주의 신학은 자연과 초자연의 이분법 구도에서 기독교 신앙을 초역사적으로 읽어내는 정통적 입장을 밀어내고, 역사와 문화 내에서의 현실과 초현실의 변증법적 교차를 논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지점을 구체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길 중 하나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211쪽)
‘무속 전통의 보존 및 계승이라는 목적과 원형 발굴’이라는 담론은 과연 무속의 동시대적 특성을 이해하는 데 적합한가? 한국 무속이 단순히 전통문화의 잔존물 혹은 전근대성의 지표가 아니라 여전히 현대 한국인들에게 의미 있는 종교적 세계관으로 기능하고 있다면 현대 한국 무속은 어떠한 설득 구조를 형성하고 있을까?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고자 본고에서 착안했던 방법은 무속의 설득 구조를 구성하는 다원적인 무속 세계관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248쪽)
기원후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고 교회는 급속도로 제도화의 길을 걸었다. 거대 조직이 생겼고, 조직을 꾸려나가기 위해 수많은 지도자들이 등장하면서 직무의 권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의 가르침과 멀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예수는 온갖 불의와 억압에서 우리를 구해냈으며 우리로 하여금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기 원했다. 구별은 있으나 차별은 없는 곳, 하는 일은 각각 달라도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 사회, 의인과 죄인의 기준을 만들어 구원의 우선순위를 정해 놓지 않은 곳. 역사의 예수가 의도한 ‘평등’은 일세기 교회의 꿈이었다. (2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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