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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걸음의 여행

백 걸음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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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2년 03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368쪽 | 432g | 145*215*30mm
ISBN13 9788901143149
ISBN10 8901143143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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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어나던 그 순간부터 운명이 결정되었는지, 맨 처음으로 느낀 감각이 방바닥을 통해 식당 위에 있는 우리 부모님 방으로 스며 올라온 향신료를 넣은 생선카레 냄새였다. 그 어린 나이에도 그 향기를 통해 멀고 먼 어딘가에 상상도 할 수 없는 멋진 신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걸까, ---p.10

어머니는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것을 해보는 걸 겁내면 안 돼, 하산. 그건 아주 중요한 거야. 인생의 양념 같은 것이니까 말이야.” ---p.43

바로 그때 또 한 번 우주가 나의 내면의 욕구에 응답하는 것 같은 일이 벌어졌다. 차가 검은 연기를 토해 내며 부르르 떨었다. 운전대를 주먹으로 쳤지만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아버지는 길가로 차를 몰고 가서 세웠다. 우리 차가 고장 나서 멈춘 곳 옆에는 우아한 저택이 서 있었다.
“간판에 ‘팝니다’라고 써 있네요.” 내가 말했다.
운명이란 정말 강력한 것이다. 절대 벗어날 수가 없다. 아무리, 아무리 애를 써도. ---pp.92-93

산에서 세찬 바람이 불어와 엄마와 내 조국 인도의 엣 추억을 단숨에 날려버리더니, 전혀 새로운 느낌이 그 자리를 메웠다. 처음에는 약간 떨릴 뿐이었다. 그런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수록 떨림이 점점 강해졌다. 아주 오래전 나를 스치고 간 바람은 여인들의 향기가 뒤섞인 프랑스 요리의 모습과 향에 대한 강한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p.113

“저 아이가 가지고 있었어. 하필 저 아이가.”
“뭘 말이에요? 저 아이가 뭘 가지고 있는데 그래요? 대체 뭔데 이러냐고요?”
“저 아이.” 말로리는 목까지 메어왔다.
말로리는 냅킨을 입으로 가져가 자기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신음을 막았다. “아, 이럴 수가.”
그녀의 두 눈은 마치 아주 매운 카옌페퍼와 카레가 입 안에 불을 지른 듯 이글이글 타올랐다.
“천부적인 재능.” 냅킨으로 입을 막은 채 말로리가 말했다. ---p.146

“내가 만든 페이스트리 좀 먹어보렴. 말해 봐. 어떤 맛이 나지?”
“살구하고 아몬드 소 맛요. 그리고 얇은 육두구 한 겹이랑 피스타치오 반죽 맛도 나고, 달걀노른자와 꿀을 발라 윤기를 낸 거네요. 그리고 잠깐만요, 이건 바닐라예요. 바닐라 열매를 으깨서 그 가루를 넣었네요.”
마담 말로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늘 위 어딘가에 여신이 무너진 가슴을 안고 흐느껴 울기라도 하듯 비가 쏟아지는 창밖만 하염없이 내다보았다. 한참 만에 돌아선 말로리는 스페인 산 올리브처럼 반짝거리는 눈으로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린 채 무섭게 나를 노려보았고, 나는 난생 처음 내가 절대미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pp.190-191

그 다음날 고모와 메흐타브가 가방 챙기는 걸 도와주었고 나는 길을 건넜다. 판지 여행 가방을 들고 우리집에서 르 솔르 플뢰뢰르까지 백 걸음 너머의 새로운 세상으로 여행하는 동안 만감이 교차했다. 겨우 백 걸음 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였지만, 마치 하나의 우주에서 또 다른 우주로 가는 듯 한없이 멀게만 느껴지던 그 여행을 하는 내 앞을 알프스의 햇살이 환히 비춰주었다. ---pp.208-209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파리로 가겠다는 결심을 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가족 때문이 아님을. 가족이 나를 붙잡아서가 아니라 사실은 내가 그들을 붙잡고 놓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 바로 내가 진정으로 어른이 된 순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축축한 숲속에서 비로소 ‘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전 세상을 보러 나갈 준비가 되었어요’라고 나 자신에게 말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247
“주방 직원들, 그리고 프런트룸 직원들, 모두 잘 들으세요. 내일부터 지금의 메뉴를 모두 버리겠습니다. 지난 9년간의 메뉴 모두 그만둡니다. 진한 소스, 화려하게 치장한 요리 모두 이제 그만둡니다. 내일부터 우리는 완전히 새롭게 태어날 것입니다. 지금부터 여기, 르 시엥 메샹에서는 소박하고 단순한 음식, 가장 신선하고 아름다운 재료 자체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요리를 만들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하면 이제부터 머리를 굴려 기기묘묘한 요리를 만들어낼 필요도 없고, 화려하게 불 쇼를 할 필요도 없고, 유행에 신경 쓸 필요도 없다는 뜻입니다.” ---pp.309-310

조명이 어두워지더니 여기저기 테이블에서 기대에 찬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만찬장 뒤편에서 촛불행렬이 이어지더니 그 뒤로 수십 명의 젊은 웨이터들이 자고새구이가 담긴 은접시를 높이 들고 나타났다. 만찬장 전체가 술렁이며 박수 소리까지 터져 나왔다. 다음날 신문들은, 내가 ‘폴을 추모하는 자고새’라고 이름 붙인 이 요리가 그날 만찬의 하이라이트였다고 썼다. ---pp.320-321

“인생에서 길을 잃었을 때 네가 나를 찾아왔어. 덕분에 나는 다시 제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너에게 그 점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있단다. 네 덕분에 좋은 취향이라는 것이 속물들의 타고난 권리가 아니라 신이 주신 선물이고, 가끔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사람에게도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p.353

줄거리 줄거리 보이기/감추기

인도 뭄바이, 할아버지의 식당 위층에서 매콤한 생선카레 냄새를 맡으며 태어난 하산은 요리의 신이 될 운명의 아이. 그러나 어린 나이에 어머니의 비참한 죽음을 겪고, 온 가족이 인도를 떠나 유럽 전역을 떠돌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프랑스 깊은 산속 뤼미에르에 정착한다. 그곳에 인도 음식점을 차린 하산의 가족은 고요한 시골 마을에 독특한 향신료 냄새를 풍기며 마을 사람들의 삶을 뒤흔들어놓는데, 문제는 바로 앞집이 프랑스의 저명한 셰프 마담 말로리의 레스토랑이라는 것. 불과 100걸음의 거리를 앞에 두고 온갖 해프닝과 격렬한 싸움이 벌어진다. 우여곡절 끝에 마담 말로리는 하산에게서 서양 요리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하고 그를 가르치기로 한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난 그의 스승은 처음에는 하산을 끔찍이도 싫어하지만 훗날 그의 위대한 성공을 가능케 한 장본인이 된다. 작은 인도 요리집 아들에서 이제 정통 프랑스 요리사의 길을 가게 된 하산. 인도 음식점과 정통 프랑스 레스토랑을 배경으로 서로 다른 문화와 욕망 사이에서 겪는 갈등과 자신의 꿈을 경험하고 실현해 간다. 그리고 마침내 꿈의 무대인 파리로 진출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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