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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 수필

손바닥 수필

[ 리커버 에디션 ]
리뷰 총점9.0 리뷰 30건 | 판매지수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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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가족 에세이 top100 56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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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7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264쪽 | 408g | 125*185*20mm
ISBN13 9788994054223
ISBN10 8994054227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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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날, 이웃 마을 교회당에서 들려오던 종소리가 생각난다. 날 밝기 전, 교회를 떠나간 종소리들은 해질녘이면 슬그머니 종루 안으로 기어들곤 했다. 반겨주는 이가 없어서였을까. 저녁답의 종은 더 길게 울었다. 아련한 종소리의 여운 속에서 나는 종소리가 갔다 온 거리가 어디까지였을까 혼자 상상해보곤 했다. 종소리는 어김없이 돌아왔지만 집 나간 백구는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는 노래, 돌아올 줄 모르는 강아지, 멀어져간 얼굴, 떠나버린 시간, 사라진 것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잠들지 못해 뒤척이는 밤, 내 안 어디 컴컴한 그늘에서 홀연히 살아오는 옛 친구의 노랫소리를 듣는다. 사라지는 것들도 종소리처럼 슬그머니 돌아와 숨는 것인가. 어스름 동굴 속 강고한 바위에 암염처럼 엉겨 붙어 있다가 오색 고운 빛가루 되어 분분히 날리기도 하는 것인가.
--- p. 12

근원을 팽개치고 떠도는 철새가 유목민이라면 제 키의 다섯 배가 넘는 깊이까지 뿌리를 내리고 살아내는 풀은 토착민이다. 종잡을 수 없는 거리를 날아 먹이를 얻고 새끼를 건사하는 새들과, 불시착한 자리에 꿈을 파묻고 살아 있음의 의무를 완성해내는 풀꽃 사이에서, 떠나지도 머물지도 못하고 어정거리며 사는 인간이 수상한지 왜가리 한 마리 아까부터 갸우뚱한 물음표로 물 가운데 서 있다.
--- p. 15

낭창거리는 아라리가락처럼 길은 내륙으로, 내륙으로 달린다. 바람을 데리고 재를 넘고, 달빛과 더불어 물을 건넌다. 사람이 없어도 빈들을 씽씽 잘 건너는 길도 가끔 가끔 외로움을 탄다. 옆구리에 산을 끼고 발치 아래 강을 끼고 도란도란 속살거리다, 속정이 들어버린 물을 꿰차고 대처까지 줄행랑을 치기도 한다. 경사진 곳에서는 여울물처럼 쏴아, 소리를 지르듯 내달리다가 평지에서는 느긋이 숨을 고르는 여유도, 바위를 만나면 피해가고 마을을 만나면 돌아가는 지혜도 물에게서 배운 것이다. 물이란 첫사랑처럼 순하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나란히 누울 때는 다소곳해도 저를 버리고 도망치려하면 일쑤 앙탈을 부리곤 한다. 평시에는 나붓이 엎디어 기던 길이 뱃구레 밑에 숨겨둔 다리를 치켜세우고 넉장거리로 퍼질러 누운 물을 과단성 있게 뛰어 넘는 때도 이때다. 그런 때의 길은 전설의 괴물 모켈레므벰베나 목이 긴 초식공룡 마멘키사우르스를 연상시킨다. 안개와 먹장구름, 풍우의 신을 불러와 길을 짓뭉개고 집어삼키거나, 토막 내어 숨통을 끊어놓기도 하는 물의 처절한 복수극도 저를 버리고 가신님에 대한 사무친 원한 때문이리라. 좋을 때는 좋아도 틀어지면 아니 만남과 못한 인연이 어디 길과 물뿐인가.
--- p. 22

열정도 도전의식도 없이, 젊음의 푸르른 모퉁이를 청처짐하게 돌아 나온 다음에야 나는 비로소 이 불가해한 생이 조금씩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일상이라는 평면 안에 얼마나 무수한 함정과 돌기들이 시치미를 떼고 숨어 있는지, 어둡고 밋밋한 생의 액정에 얼마나 다양한 화소들이 깜박이고 두근대며 살고 있는지, 뒤늦은 호기심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구석에 숨고 뒷걸음질만 치던 나에게도 한줌의 광기와 시답잖은 열정이 숨어 있었음을 눈치 챈 것도 내 생의 시곗바늘이 삶의 영마루를 한참이나 지나쳐 온 다음의 일이었다.
--- p. 28

고무신. 덧신. 털신. 나막신…….
발싸개의 이름이 왜 신인지 알겠다. 존재의 가장 밑바닥에서 존재의 무게를 떠받치며 겸허히 동행해주는 그를 신이라 불러도 틀리지 않으리. 가시떨기와 돌멩이와 사금파리 같은 것들로 거칠거칠한 바닥일수록 신의 존재는 불가결하다. 광야에서도 도시에서도 신 없이 세상에 나갈 수는 없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하늘을 우러러 손을 모으지만 신은 어쩌면 발바닥 보다 더 낮은 아래에서 우리의 행로를 주관하고 계시는지도 모른다.
--- p. 32

또깍 또깍…….
발톱 깎는 소리가 방안을 울린다. 분주한 일상, 발톱 깎는 시간만큼 오롯한 시간도 없다. 바람은 고요의 바닥을 훼치고, 창밖엔 어린 별들이 글썽거린다. 기다릴 사람도 그리운 사람도 없는 저녁, 신경은 발톱 끝에 집중되어 있다. 적막한 공간에 파종되는 소리, 소리들……. 무슨 씨앗 같기도 하고 섬세한 금은세공품 같기도 한 파적破寂의 음향이 시간의 고즈넉한 결 위에 미세한 족적을 남기고 사라진다.
--- p. 40

그래, 봄이야, 봄. 봄(見, seeing)이라고! 봄에는 그저 ‘봄’만 할 일이야. 나무처럼 안으로 나이를 감추고 봄 햇살 속으로 ‘봄’ 하러 가야겠어. 느껴야 할 때 생각하고 생각해야 할 때 느끼는 얼간이 맹추 노릇 집어치우고 말이야. 생명이 절정의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갈 때에는 가던 길을 멈추고 바라봐 주어야 해. 그것이 생명의, 생명에 대한 예우야. 보고 또 보고 더 이상 볼 게 없다 싶어지면 감추어 둔 뿔 꺼내 얹고 세상을 멋지게 들이받아 볼 거야. 제 심장을 꼬챙이에 꿰어 어디론가 날아가는 저 새처럼 말이야.
--- p. 43

술은 차게 마시고 차는 뜨겁게 마신다. 찬 술은 가슴을 뜨겁게 데우고 뜨거운 차는 머리를 차갑게 식힌다. 술은 기분을 끌어올리고 차는 마음을 가라앉힌다. 집 나간 마음을 불러들여 마주 앉고 싶을 때엔 조용히 앉아 차를 마시고,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헤쳐 숨통을 틔우고 싶을 때는 여럿이 어울려 술잔을 기울인다. 술과 차는 따르는 법도 다르다. 천차만주淺茶滿酒, 술잔은 그득히 채워야 하고 찻잔은 얕게 따라야 한다.
--- p. 44

거실에 걸린 벽시계가 길고 짧은 팔을 휘저으며 허공중에 떠다니는 시간의 알들을 잡아채 간다. 기다랗게 늘어진 시간의 성충은 여물 썰듯 썽둥썽둥 썰어 삼킨다. 탁상시계도 들키지 않으려고 가만가만 어금니를 똑딱거린다.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휴대폰 속에 내장된 녀석들은 훨씬 음험하고 지능적이어서 씹는 소리조차 내지 않는다. 사람들이 잠들거나 한눈을 파는 사이, 두 눈 뜨고 번연히 지켜보는 코앞에서, 시간은 끊임없이 강탈당한다. 나뭇결처럼 따스한 시간들,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의 기억들이 시계 속 숨겨진 이빨 사이에서 부스러지고 잘게 갈려 삼켜지고 사라진다.
--- p. 49

배꼽은 살아 있는 전설이다. 그것은 어느 한 시절, 한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의 내부에 온전히 의존적으로 착생하여 존립하였음을 입증하는 유일무이한 증표다. 신체의 다른 어떤 기관도 한 개체와 다른 개체가 한 줄의 끈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음을 명쾌하게 설득하지 못한다. ‘신은 가시면서 배꼽 위에 어머니를 조금 남겨두고 가시었으니’라는 김승희 시인의 시구대로, 배꼽은 우리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목숨이거나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줄줄이 생산된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성스럽게 각인시킨다. 내 배꼽에서 어머니의 배꼽으로, 어머니의 배꼽에서 할머니의 배꼽으로……. 홀 맺힌 끄트머리를 조심조심 풀어 인연의 탯줄을 거슬러 오르면 생명의 원류에 도달할 수 있을까. 저 하늘 너머 우주의 배꼽까지 당도할 수 있을까. 최초의 어머니 이브에게도 배꼽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배꼽은 어쩌면 생명 탄생과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이치까지를 함구하고 있는 비밀스런 입술일지도 모른다.
--- p. 56

동백도 꽃무릇도 없는 계절에 먼 도량을 찾아든 것은 얼기설기한 잡념들을 비워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물처럼 흐르고 불처럼 타오르고 총알처럼 날아가 누군가의 심장에 박히기도 하는 마음. 마음이라는 애벌레는 몸 안 깊숙이 숨어 살면서 수시로 몸 밖을 기웃거린다. 말에, 표정에, 물건에, 돈 봉투에, 무심한 바윗돌에 스며서라도 어떻게든 몸 밖으로 빠져나오려 한다. 마음을 매어두는 고삐도 마음이요 마음을 움직이는 지렛대도 마음이지만 마음만큼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것도 없다. 고이고 흐르고 출렁이고 쏟아지고, 뜨겁게 끓어올랐다 차갑게 얼어버리기도 하는 마음은 엎질러지고 나면 주워 담기도 어렵지만 비우고 싶다 하여 비워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 p. 64

배롱나무의 벗은 몸은 매혹적이다. 누구는 상서로운 서기瑞氣를 발산하는 풍만한 꽃 잉걸을 찬탄하지만 나는 그의 벗은 몸에 반한다. 꽃으로 치장하고 잎으로 가리고 열매를 매달아 아름다운 나무 중에 나신까지 귀골貴骨인 나무는 드물다. 몽환적인 산수유도, 낭창대는 실버들도, 황금빛 스팽글의 은행나무도 벗겨놓으면 천격인 데 반해 자작나무나 배롱나무는 벗어도 귀티가 난다. 자작나무가 세상물정 모르는 늘씬한 서양 귀부인이라면 배롱나무는 면벽 수련 틈틈이 권법을 익힌, 내공 깊고 다부진 동양의 선사다. 건포마찰로 단련시킨 남자의 살갗처럼 기름기 없이 빛나는 피부, ‘앙’ 하고 깨물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만큼 단단해 보이는 팔뚝, 쇠심줄처럼 구불거리며 허공을 껴안는 손가락들. 꽝꽝한 겨울 추위를 말없이 견디고 정물처럼 서 있는 한겨울 배롱나무가 서사를 버린 통찰의 결구처럼 비장미마저 느끼게 한다.
배롱나무는 운치를 아는 나무다. 드넓은 허공이라고 함부로 가지를 뻗지 않고 공간을 미학적으로 세분할 줄을 안다. 연과 행을 정확히 계산하여 말을 앉히는 시인처럼 가지와 가지 사이의 여백을 회화적으로 분할한다. 꽃이 흐드러진 여름에도 질펀하다거나 농염한 느낌보다는 화려하면서 단아한 느낌이 강하다. 휘어지고 틀어지면서도 애써 수형을 잡아가는 가지의 역동적인 조형성에서, 돋쳐 오르는 대지의 기운을 다스려내는 나무의 웅숭깊은 풍격을 읽는다. 나무는 진즉 알고 있는 것일까. 절제된 관능만이 대상을 더 깊숙이 끌어당기는 이치를.
--- p. 70

사람의 내면에 슬픔의 안개가 가득하면 눈빛으로 온 몸으로 슬픔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온다. 슬픔에도 반감기가 있어 봄 햇살에 천천히 바래지거나, 가을 빗소리에 녹아나오거나, 깊은 밤 뒤척이는 베갯머리에 어둠침침한 꿈으로 묻어나기도 하지만, 끝끝내 증발하지 못한 슬픔의 흰 뼈들은 육신과 함께 순장되어 흙속에 파묻힌다. 살아 있는 것들의 모든 소리를 한꺼번에 삼켜버리는 흙, 세상에 흙처럼 무정한 것은 없다. 흙에 덮이면 모든 것이 무효다. 순간의 기억도, 투쟁의 역사도 속절없이 무화되어 버린다.
--- p. 74

파밭에 서면 꽃 진 나팔꽃 같은 나도 푸르게 흙 기운을 빨아올리고 싶어진다. 해거름 밭둑에 머리카락 반쯤 파묻고 서서, 퇴각하는 세월 뱃구레라도 오지게 한번 발길질해보거나, 줄 지어 도열한 유리폭탄들, 푸른 화염병들 쑥쑥 뽑아들고 멀어지는 젊음의 뒤꽁무니를 향해 통쾌하게 투척해보고도 싶다. 어퍼컷 한 방 날려보지 못한 인생, 도망가다 붙잡혀 패대기쳐져도 크게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생의 시계추를 내려 당기는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기우뚱기우뚱 기울어지다 종국에는 수평으로 드러누워 버리는 것, 수평이 아닌 수직으로의 저항에서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의 투항. 목숨의 문법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니냐며 머리 풀고 밭둑에 드러누워서 속 빈 대파처럼 푸르르 웃고 싶다.
--- p. 78

높은 자리에 앉으면 심판의 권위가 절로 생겨나는가. 마당가를 오갈 때나 쪼그려 앉았을 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의자에 앉아 굽어보면 불필요한 것까지도 세세하게 드러나 보인다. 곁가지가 보기 싫게 자란 산국이며 더위에 늘어진 맥문동 이파리며, 게릴라처럼 낮게 포복하며 옆으로 기어가는 씀바귀 줄기까지 고스란히 눈에 띈다. 화초나 잡초나 한 끗 차이련만 웃자란 쇠비름이 채송화 줄기 위로 붉은 장딴지를 슬며시 뻗는 것도 내 눈에는 썩 고와 보이지 않는다. 높이가 주는 시각 차, 기껏 한 뼘쯤 높이 앉았을 뿐인데 만족스런 것보다 못마땅한 것들이 더 잘 보이는 것, 이상한 일이다.
--- p. 83

썩는다는 것은 형과 색과 살 속에 스민 생명의 기미를 해체한다는 뜻이다. 물질적 몸의 세상을 버리고 우주적 무의 권역에 복귀한다는 뜻이다. 덧없이 스러지고 소멸되는 게 허망해서 되지 않은 글줄이나마 끼적거려보는 것도 썩어지는 것이 두려워서인지 모른다. 이대로 그냥 묻힐 수는 없다고, 서둘러 몸 밖으로 빼내주지 않으면 흔적조차 남지 않고 소멸되어 버릴 것 같다고, 필사必死의 육신 안에 갇혀 사는 어리보기 정령 하나가 절박하게 SOS를 외치고 있는 것 같아서, 내가 나에게 방부제 치듯 시시때때 키보드를 두드려대는지 모른다.
--- p. 87

조금은 과장이겠지만 딴엔 이해가 가기도 해요. 붉으죽죽한 갱도 안, 이끼 낀 바윗돌들이나 들여다보다 삼십 년이 흘러버린 사람. 머리 위를 비추는 태양도, 망망한 바다도, 애써 눈 감고 살아왔겠죠. 사막 같은 삶이지요 라고, 언젠가 그가 이야기했듯이. 하긴, 일상은 누구에게든 사막이지요. 정상을 향하여 묵묵히 오르기만 해도 좋을 산과는 달리, 사막에는 바라봐야 할 푯대가 없잖아요. 끝없이 멀어지는 지평선을 향하여 어디엔가 숨어 있을 오아시스를 꿈꾸며 걷고 또 걸어야 할 뿐.
--- p. 100

갈모산방이란 전통한옥의 추녀에서부터 부챗살처럼 퍼지는 선자서까래 아래에 대는, 삼각형 모양의 부재를 일컫는다. 팔작지붕은 학이 날개를 편 것처럼 양 처마 끝이 휘어져 올라가 멋들어진 중지곡선을 형성하는데, 자연 상태에서 적당히 구부러진 재목을 구하는 일이 쉽지 않다보니 처마도리 밑에서 인위적으로 서까래를 받쳐주는 받침재가 필요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갈모산방이다. 도리와 추녀사이에 끼어 있어 쉬 눈에 띄지는 않지만 갈모산방이 없으면 한옥지붕 고유의 날렵한 맛을 내기 어렵다.
--- p. 110

성찰의 시간을 외면한 채 낮도깨비처럼 살아내는 내게도 시간을 견디어낸 것들에 대한 신뢰 같은 것이 있다. 썩지도 않고 흐르지도 않고 그윽하게 부활하는 장독 안의 시간들처럼 그렇게 발효되고 숙성될 수 있다면 빛도 바람도 차단한 채 내 삶의 어느 마디를 눈 딱 감고 봉인해두고 싶다. 넓게 파야 깊게 팔 수 있다고, 내면에 집중하면 내면이 좁아진다고 줄기차게 쏘삭거리는 도시의 노회한 원심력에 언제쯤이나 초연할 수 있을까. 오래된 책들이 꽂혀 있는 오래 만난 사람의 글방에서 오래 묵힌 보이차를 나누어 마시며 오래 묵은 것들의 향내를 생각한다.
--- p. 119

가만히 있다 해서 좋고 나쁨이 없는 건 아니다. 아름다운 소리는 귀에 달지만 시끄러운 소리는 거슬린다. 단지 내색을 안 할 뿐이다. 눈과 입이 작당하여 아첨하거나 알랑거리는 것을 교언영색巧言令色이라 하는데 귀는 교언도 영색도 하지 않는다. 누굴 위해 아부하며 누굴 위해 눈웃음치랴. 흔들리는 눈빛, 변명하는 입술과 달리 부끄러운 일을 하면 저 혼자 발그레하게 물들어버릴 만큼 정직하고 우직한 것이 귀다. 경망스럽고 호들갑스러운 눈 코 입과는 애당초 거리를 두고 물러앉아 침묵하는 성 밖의 무언군자無言君子, 그게 귀란 말이다.
비례와 대칭을 미의 근간으로 삼는 조물주는 눈동자나 콧구멍처럼 귓바퀴도 대칭으로 앉혀 두셨다. 하지만 귀는 다른 것들처럼 가까이 붙어 있지 않고 최대한 멀리, 반대으로 떨어져 있다. 소리가 나는 방향을 입체적으로 감지하여 적의 공격에 대처하기 위함이다. 눈꺼풀과 입시울이 닫히고 심신이 다 잠든 뒤에도 귀는 위험을 가장 먼저 감지한다. 심장이 멎고 호흡이 끊어져도 최후까지 살아 있는 감각이 청각이라는 말도 있다. 잠들어도 잠들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소임을 다하려 애쓰는 성실한 불침번이 귀인 것이다.
--- p. 120

욕망을 삼키고 불안을 내뱉는 걱정 바이러스에게 인간의 몸은 최상의 숙주였다. 이런저런 욕망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인체야말로 젖과 꿀이 넘치는 환상의 낙토였다. 그들의 진화와 함께 인간 역시 진화했다. 물질인지 생명체인지 분간이 안가는 원시바이러스가 어떻게 개체변이와 종족번식을 거듭한 끝에 오늘에 이르렀는지에 대하여는 세세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확실한 것은 오늘날 걱정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은 인간은 찾아보기 힘들 만큼 그들의 진화가 성공적이라는 사실이다. 비가 와도 걱정 안 와도 걱정, 돈이 없어도 걱정 많아도 걱정, 끼니 걱정, 취업 걱정, 사교육비 걱정, 이마에 난 뾰루지 걱정, 통일 조국의 미래 걱정……. 손톱 밑의 가시 하나에서 왜 사는가까지, 일용할 걱정이 일용할 양식처럼 지상의 인간에게 공평하게 살포된다.
--- p. 139

골목은 자주 부끄럼을 탄다. 큰 줄기에서 뻗어 나와 섬세한 그물을 드리우는 잎맥과 같이, 골목도 보통 한길에서부터 곁가지를 치고 얼기설기 갈라져 들어간다. 하여 골목의 어귀는 대충 크고 작은 세 갈래 길을 이루게 마련인데 어찌된 일인지 골목들은 입구 을 어수룩이 숨겨두기를 좋아한다. 한두 번 다녀간 골목을 섣불리 찾아 나섰다가 낭패를 보게 되는 것도 그들이 일쑤 낯가림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다 싶은데 없고 저기다 싶은 데 아니다. 눈앞을 가로막는 시멘트벽의 완강함, 4차원의 입구처럼 사라져버린 미로를 몇 바퀴씩 서성거리고 나서야 목적지를 발견할 때도 있다. 해진 속옷과 빛바랜 수건과 색색의 양말짝들이 담장 너머로 공중그네를 타고, 밤사이 새끼를 친 무수한 말들이 담벼락 사이로 수군수군 넘나드는, 응달진 사람들의 남루한 삶터가 부끄러워 골목은 자꾸만 꼬리를 감추고 싶어 하는지 모른다.
--- p. 150

거실 가득 퍼즐 조각들을 늘어놓고 잠들어버리는 아이처럼, 감나무 그늘 아래 소꿉장난을 하다 저녁 먹으러 가버린 어린 날의 친구처럼, 벌여 놓은 자리 치우지 못하고 황황히 떠나는 게 인생인 것 같아요. 아침에 떴다 저녁에 지는 해도 한동안 붉은 기운이 남아 있는데 숨이 끊어지고 꺼풀이 닫혔다 해서 수십 년 온축된 생의 기억들이 설마하니 단숨에 사라져버릴까요. 빛과 소리의 속도가 다르듯 육신과 정신의 죽음도 제각각 다른 속도로 완성되어 적멸에 이르는 것 아닐까요. 육신의 빛이 사위고 난 다음에도 의식은 천천히 어두워질 거라는, 육신과 정신의 달리기 속도가 생각보다 크게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나를 두렵게 합니다. 그런데 좀 섬뜩하지 않나요? 이승과 저승 사이, 그 아찔한 크레바스가 눈꺼풀 바로 아래, 두 속눈썹 사이에 숨겨져 있다니요.
--- p. 161

묵은 노트들을 폐지봉투 안에 던져 넣으며, 사는 일 또한 허물벗기에 다름 아니리라는 생각을 한다. 수없이 옷을 바꾸어 입고 매순간 나를 복제시키며 살아도 허물은 허물虛物일 뿐, 내 안 깊숙이 숨어 있을 실물實物은 끝내 빛을 보지 못하고 한 포기 백합처럼 시들고 말지 모른다. 날개인 줄 알았던 것도 시간의 환幻일 뿐, 세월이 지나면 그 또한 남루한 거스러미에 불과해보이지 않던가. 일생 아등바등 허물을 짓고 벗다가 생명이 빠져나간 몸뚱이 하나 덩그러니 남겨두고 떠나는 인생. 그러고 보면 삶이란 무수한 꺼풀 뿐, 핵核이 없는 빈탕일지 모른다. 눈물 콧물 흘리며 까보아도 알심이 없는 양파처럼 말이다. 아니면 껍데기가 알맹이고 알맹이가 껍데기인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 p. 186

정해진 간격을 거스르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두 섬도 아주 가끔은 수상쩍게 맞붙을 때가 있다. 먹장구름이 하늘을 덮고 불온한 바람이 대기를 흔들면 섬과 섬 사이에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수면이 일시 출렁거리고 숲들도 꿈틀, 잠을 깨고 일어선다. 샅바싸움보다 기 싸움이 먼저라고, 수크령처럼 털을 세운 섬들이 앞머리를 박을 듯 으르렁거리며 격돌한다. 아랫녘 호숫가에 번개가 치고, 남녘 어디에서 우레 소리와 따발총 소리가 뒤섞이기도 한다. 풍랑이 거세지고 해일이 일면 호수가 범람해 넘치기도 하지만, 섬들이 떠내려가거나 가라앉는 일은 유사 이래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 p. 190

세상은 타악기다. 두드려서 소리 나지 않는 것은 없다. 가볍게 속을 뱉어낸 낭인들은 악기라는 이름으로 화사한 가락을 휘감으며 살지만, 세상에 태어나 쓸모로만 기억되고 소모되는 물건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들이 있을 것이다. 한 마디만 거들면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고 마는 사연 많은 사람들처럼, 손가락 하나, 젓가락 하나의 장단만으로 그들은 가볍게 묵비권을 반납한다. 울고 싶을 때 누군가가 한 대 쳐주기를, 그리하여 무언가 그럴듯한 빌미를 만들어주기를 바라는 아이처럼, 누군가 다가와 굳어버린 먹가슴을 두드려주기를 내심 그렇게 기다리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 p. 206

사람의 얼굴에는 터진 구멍이 여럿 있지만 다른 것들이 다 외부의 자극을 수용하고 전달하는 점잖고 수동적인 처소인 데 반해 입은 적극적 능동적인 편이지. 먹고 마시고 숨 쉬는 외에 표정과 목소리로 희로애락을 드러내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길을 내기도 하니까. 사랑이 눈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사랑도 실은 입술에서 시작돼. 마주쳐 스파크가 일어난다 해도 눈과 눈은 물리적으로 포개지지도, 화학적으로 스며들지도 못하잖아. 도발적인 평화와 평화로운 도발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인간의 입술, 그 입술이 눈이 점찍은 대상을 향해 부드럽게 이완되어 귓바퀴를 향해 들려 올라가고, 그렇게 자주 마주서면서 물길 불길을 이어붙이지 않으면 사랑이라는 역동적인 서사는 결단코 이루어질 수가 없어. 가슴과 가슴을 맞대고 포옹해도 심장끼리는 절대로 포개지지 않는 법이어서 그렇게 서로 입술과 입술을 견주어 상대를 면밀히 재단해보려는 것 같아. 그 방법 밖에는 제 안에 유숙하는 영혼의 몸피를 가늠해볼 방책이 없을 테니까.
--- p. 221

걷는다는 것이 기실은 내면적인 행위라는 것을 올레를 수없이 돌고서야 알았다. 몸 밖 세상을 휘휘 돌아도 귀착지는 결국 내 안의 땅, 내 안의 나를 만나는 것이었다. 걷는 일이 다리운동인 동시에 뇌운동이라는 사실도 제주에 와서 알았다. 햇살, 바람, 파도소리, 갯내음, 싱싱한 미각 같은 오감이 총체적으로 어우러져 기억으로 각인된다. 두 다리로 올리는 기도, 몸으로 하는 구도 행위, 걷기는 수행이다. 자기회귀다. 소는 위로 되새김질을 하지만 인간은 다리로 되새김을 한다. 바람을 거느리고 파도를 벗 삼아 생각 없이 걷는 반복적 리듬 속에서 생각이 열리고 가슴이 트인다. 누구는 그것을 행선行禪이라 했지만 나는 따로 보선步禪이라 하고 싶다. 소유에서 존재로! 도道의 궁극 또한 그것 아닌가.
--- p. 232

눈을 감고 잠시 바람소리에 취해 있다 부스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몇 발짝 저편, 얼크러져 누운 억새 숲 사이에 비구니 한 분이 빙그레 웃고 서 계셨다.
“가을에는 바람에게 지느러미가 돋아나요. 연못 속 올챙이에 앞발 뒷발이 돋아나듯이. 늦가을 언덕에 일렁이는 바람의 은빛 지느러미, 억새랍니다. 억새풀들은 바람의 왕궁에 소속된 음유시인처럼 바람과 함께 누웠다가 바람과 함께 일어나지요…….”
그제야 알았다. 섬이 둥둥 떠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날지 못하는 새들이 깃털을 뽑아 섬의 등때기에, 옆구리에, 아가미 부위에 은빛 지느러미를 한 터럭 한 터럭 부지런히 짜 붙여주고 있었다는 것을.
--- p. 246

육지의 끝자락은 언제나 젖어 있다. 바다가 저만치 물러난 다음에야 뭍은 슬며시 치마를 걷는다. 점잖은 척 물러 앉아 있지만 하늘과 바다가 한 통속으로 스미는 소리에 내심 자극받고 있다는 증좌다. 흰 레이스 자락 아래 잠깐씩 드러나는 눈부신 뭍의 속살, 물러가던 바다가 되돌아와 달려들면 뭍은 다시 맨살을 감춘다. 갈망과 유혹으로 되풀이되는 노련한 관능의 숨바꼭질, 그 되풀이가 우주의 리듬을 창출한다. 바다-하늘. 하늘-대지, 대지-바다. 그것들이 함부로 몸을 섞어 바람과 파도, 구름을 낳는다. 이 거대한 혼음混淫의 현장. 세상이 갑자기 엄청난 음양의 카오스로 느껴진다. 그런 이치를 이제 알았느냐며 빛바랜 겹동백 하나, 퇴기退妓처럼 웃고 있다.
--- p.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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