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야김, 바벨론, 느부갓네살, 예루살렘…. 유대인들에게 이런 말들은 죄다 악성코드입니다. 겨레의 아픔이요 상처였습니다. 살 떨리는 기억이 되살아나는 말들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서를 쓴 이는 이런 기억을 끄집어내고 있어요. 까닭이 있겠지요? 앞으로 계속 말씀드리겠지만, 일단 여기서 간단히 짚어보자면, 저자가 이 책을 쓰고 있는 때가 여호야김 때만큼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입니다.
학자에 따라 의견이 갈리기는 해도, 저는 이 책이 여호야김 이후 400년이 훨씬 지난 주전 168-165년 셀류시드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에 피파네스가 다스리던 때에 기록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유대인들 은 매서운 박해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율법과 신앙에 관한 그 어떤 일을 하더라도 목숨을 걸어야 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가 지켜보는 앞에서 일곱 명의 아들이 차례로 고문당하다가 죽는 일도 있었습니다(마카베오하 7장).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순교자들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에도 순수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지금이 어려운가? 우리보다 훨씬 더 어려웠던 시대를 살았던 믿음의 조상들이 있었다!”
저자는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_ 23p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지금 여기서 예배드리는 분들 가운데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뭔지 모르거나 아무 관심도 없는 분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모두들 나름대로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있어서 교회로 옵니다. 효도 차원에서 온 것이든, 가정의 분위기 때문이든, 사업이나 직장에서 어떤 깨달음이든,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주신 주님의 음성이든, 건강문제든,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든, 느부갓네살처럼 꿈 때문이든, 그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우리 스스로 신앙을 선택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모든 이의 삶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죽고 싶어서 죽는 사람은 없지요.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 죽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다고 합니다. 살아 있는 생명은 모두 하나님과 관계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하나님의 부르심이나 다스리심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죽은 것과 다름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놈은 절대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은 놈이야!”라고 말할 만한 사람이 느부갓네살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이라는 말을 제 식대로 풀어 보자면, ‘절대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놈!’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깨부순 장본인이거든요. 성전을 박살냈습니다. 나중에 보면, 느부갓네살이 성전에서 빼앗아 온 그릇에다 흥청망청 술을 따라 마시는 일도 벌어집니다. 그러니 죽었다 깨어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할 만하지요. 그런 사람이 지금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깊은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꿈 때문에! 잠자리에 눕기가 겁났을 것입니다. 유대인 독자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대번 알아듣지요. 꿈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통로였습니다. 대개 교만한 자들에게! _ 48-49p
이 철의 나라의 중요한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강하다. 그런데 불완전하다!” 어떻게 된 나라가 세기는 엄청 센데(40절), 발과 발가락 일부가 흙으로 되어 있어요. 종아리는 철이었는데, 발과 발가락서부터는 철과 진흙이 섞여 있습니다. 철과 흙, 좀 이상하지요? 조화를 이루기 어려운 조합입니다. 잘 붙어 있지 못할 것 같아요. 쇠처럼 단단한 면도 있지만, 진흙처럼 부서지기 쉬운 면도 가진 나라가 이 넷째 나라였습니다. 자, 그럼 이 나라는 무엇일까요?
학자들은 로마로 보기도 하고, 헬라 곧 그리스로 보기도 합니다. 저는 그리스로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더 역사와 잘 맞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하면 알렉산더 대왕이 생각나지요? 그리스서부터 남쪽으로는 이집트, 동쪽으로는 인도 북서부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왕이었습니다. 33살에 요절하지요. 이 왕이 죽고 나서 제국은 분열됩니다. 강철처럼 강하기만 할 것 같던 나라가 쪼개져요. 이집트 쪽에는 프톨레미 왕국,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셀류시드 왕국이 섭니다. 이렇게 갈라져요. 아주 강했지만, 내부의 모순과 갈등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는 나라, 이것이 넷째 나라였습니다. _ 109p
3절에 나오는 ‘그의 나라, 그의 통치’라는 표현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서는 여기 나오는 시대보다 약 400년 후 사람들이 그들이 살던 시대 사람들을 위해 쓴 것이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때는 에피파네스라는 천하의 못돼 먹은 왕이 유대인을 박해하던 때였습니다. 그 무서운 박해의 시대를 살던 사람들에게, 400년 전에 있었던 느부갓네살을 생각해 보라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악하기로는 에피파네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조금도 덜하지 않았던 천하의 느부갓네살도 이렇게 순한 어린 양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통치를 찬양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나라, 자기의 통치를 주장하던 왕, 그 큰 나무 같던 왕도 하루아침에 베어졌다. 그리고 정신 차린 거다. 이 세상의 나라가 최고의 권력인 줄 알지? 천만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인간 세상의 나라를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라!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통치를 찬양한 역사가 있었단 말이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을 그렇게 거두셨습니다. 농부가 곡식을 거두듯이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를 고백하는 신앙으로 거두셨어요. 그러고 나서야 느부갓네살은 비로소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수 있었고, 그런 내용을 자신의 조서에 담은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제가 나누고 싶은 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종교개혁의 길이고, 하나님은 그런 믿음의 인생만을 천국 창고에 알곡으로 들이십니다. _ 191-192p
오늘 읽은 7장부터 나오는 환상은 어렵습니다. 완전히 동물의 왕국이에요. 4절에는 독수리 날개가 달린 사자가 나오고, 5절에는 곰이 나오네요. 6절은 표범입니다. 마지막 짐승은 7절에 나오는데, 이름은 없고 아무튼 무시무시하다고만 합니다. 이 짐승들이 뭘까요? 국가입니다. 23절, “넷째 짐승은 곧 땅의 넷째 나라인데….” 다니엘은 그때 시대를 주름잡던 나라들에 대한 환상을 본 것입니다! 내 미래는 어떻게 될까, 앞으로 나는 어떤 복을 받을까, 내가 갈 천국은 어떤 곳일까…. 이런 차원의 얘기가 아니었어요. 하나님은 그에게 세계사의 흐름을 계시하셨고, 그 내용은 다니엘 후대의 신앙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질문 하나 드리지요. 하나님 빼고,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것은 무얼까요? 사람이 만든 제도나 조직 중에 가장 큰 힘을 가진 것이 무엇일까요? 가정, 학교, 회사, 군대, 핵, 이슬람, 가톨릭, 피파(FIFA)…. 예, 국가입니다! 유럽연합이나 유엔 같은 조직도 있긴 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국가의 연합체입니다. 또 하나 질문. 성경의 이상은 뭘까요? 힌트,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이것을 전하는 데에 삶을 바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무엇인가요? 예, 하나님 나라입니다. 천국, 하나님 나라! 신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래요. 나라!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는 상태를 ‘나라’ 말고 다른 말로도 표현할 수 있겠지요? 이를테면,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포부, 하나님의 교실, 하나님의 기업,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길…. 그런데 굳이 ‘나라’라고 했어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의 나라! _ 305-30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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