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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 개정판 ] 문지스펙트럼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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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8년 11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244쪽 | 220g | 120*188*20mm
ISBN13 9788932035024
ISBN10 8932035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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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환성을 지르고 골짜기에 팬 가느다란 개울로 진흙투성이 팔을 휘두르며 달려갔다. 그곳에는 마른 이끼로 뒤덮인 미끌미끌한 돌과 그 사이를 흐르는 맑고 깨끗한 물이 조금 있어, 거기에 손가락을 담그자 극심한 통증이 온몸을 휘저었다. 그러나 추위에 빨갛게 부어 마비된 손가락을 쓱쓱 문지르고 있으니 손 갈퀴 사이로 아주 잠깐 생기는 작은 무지개, 햇살이 아롱거리는 반짝임 따위가 우리들 목구멍에 쾌활한 웃음을 연달아 불러일으켰다. / “깨끗이 씻어, 세균 천지야.” 내가 큰 소리로 말했다. “안 씻는 녀석을 만지면 전염병에 걸려.” / “병든 개, 병든 쥐.” 미나미가 우스꽝스럽게 소리치며 물을 사방으로 튕겼다. “병든 고양이, 병든 하늘소.” --- p.57~58

아직 시간은 있어,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제 전염병이 창궐하는 골짜기에 우리들만 달랑 남겨지는 처지를 겪지 않아도 돼. / 하지만 기대는 어이없이 무너져 내렸다. 거의 순식간에 대장장이가 오른팔에 큼직한 바구니를 그러안고 다시 뛰어 돌아온 것이다. 그는 밤눈에도 똑똑히 보이는 하얀 입김을 힘차게 내뱉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바구니 안에서 허둥지둥 날뛰고 있는 하얀 토끼를 보고 완전히 얼이 빠졌다. 마을 사람들 무리가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술렁거림이 있었지만, 우리는 그대로 주저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 “나는,” 미나미는 간신히 목구멍에서 새어 나오는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에게 알려줄 거야. 우리가 달랑 남겨졌다는 걸 알려줄 거야.” --- p.73~74

“마을 바깥에서 전쟁이 계속되고 있겠지, 지금도.” 꿈꾸는 것 같은 목소리로 미나미가 말했다. “전쟁만 없었다면, 난 쭉 남방에, 틀림없이 바다 근처에 있을 텐데.” / “전쟁은 이제 곧 끝나게 되어 있어.” 병사가 말했다. “그리고 이기는 건 적의 군대야.” / 우리는 침묵했다.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병사는 우리의 무반응에 초조해져 자신의 의견을 고집했다. /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주 잠깐 동안, 나는 숨어 있으면 돼.” 탈주병의 목소리는 기도처럼 뜨거웠다. “나라가 항복하기만 하면 나는 자유야.” / “당신은 지금도 자유잖아. 이 마을 안에서라면 무얼 해도 좋아. 어디에 드러누워 있건 누구 한 사람 당신을 붙잡지 않아.” 내가 말했다. “엄청난 자유지?” / “나도 너희도, 아직 자유가 아니야.” 병사가 말했다. “우리는 갇혀 있어.” / “마을 바깥의 일을 생각하지 마, 입 다물고 있어.” 나는 분노가 치밀어 말했다. “우린 이 마을 안에서 뭐든지 할 수 있어. 바깥의 그놈들에 대해 말하지 마.” --- p.170

“내가 이 집을 털면 우리 어머니는 마을 사람들에게 평생 괴롭힘을 당해. 나는 마을에서 쫓겨나.” 리가 말했다. “살해될지도 몰라.” / 나는 짧은 분노의 발작으로 목구멍이 뜨거워졌지만 리의 눈에서는 조용하고 부드럽게 용기를 북돋우는 촉촉함이 배어 나와 내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 “할 거야?” 내가 말했다. / “죽더라도 나는 해.” 리가 말했다. [……] “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저 집 놈들은 우리 일가를 부리고 온갖 일을 다 시켰지. 분뇨 구덩이 칠을 다시 할 때, 난 하루 종일 똥투성이로 그 안을 기어 다녔어.” / “넌 용기가 있구나.” 나는 우정에 울컥해져 이렇게 말하고는 소녀의 말이 떠올라 눈 속에 털썩 고꾸라질 만큼, 큰 소리로 울부짖고 싶을 만큼 슬픔에 사로잡혔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눈을 긁어모아 리가 종이봉투에서 꺼낸 구식 얼음주머니에 눌러 담았고, 이미 얼어붙기 시작한 눈 녹은 물구덩이에 시린 두 손을 넣어 물을 퍼 담았다. / “너도 용기가 있어.”
--- p.174~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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