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년 동안 《육식의 성정치》는 독자들의 삶을 바꿔왔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고 억압의 또 다른 측면에 기반하는 세계의 가능성을 납득했다. 그리고 이 세계를 존재하게 하는 행동주의의 중요성을 이해했다. 몇몇 사람에게 《육식의 성정치》는 여성, 동물, 환경을 위한 오랜 실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책이었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그토록 소외돼온 이유를 깨달을 수 있는 새로운 생각을 소개해줬다. 우리들의 삶이 지닌 의미를 이해시킨 셈이다. ― 15쪽
《육식의 성정치》는 우리가 먹는 어떤 것, 더 정확히 말해 어떤 존재가 우리의 가부장제 문화에 따라 결정된다고, 또한 육식에 부여된 의미가 사나이다움의 의미를 함축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인종주의와 가부장제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 세계에서는 남성들이 공적 영역(고용과 정치)이나 사적 영역(하루 평균 네 명의 여성이 구타로 사망하는 미국의 가정)에서 여성보다 큰 권력을 행사한다. 《육식의 성정치》에서 하려는 주장은 성정치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구조화되는 방식이 우리가 동물, 특히 소비되는 동물을 바라보는 시각에 연관된다는 사실이다. 가부장제는 인간/동물 관계 속에 내재돼 있는 젠더 체계다. 더욱이 이 젠더 구조는 성별에 따라 알맞은 음식을 교육하는 교육 체계도 포함한다. 우리 문화에서 남자라는 존재는 스스로 인정하든 부인하든 여러 가지 정체성을 공유한다. 그 정체성은 ‘현실의’ 남성들이 공유하기도 하고 공유하지 않기도 한다. ― 33쪽
무엇이 고기를 남성 지배의 상징이자 이 지배를 찬양하는 도구로 이용되게 만들었을까? 이유야 여러 가지일 테지만, 젠더 불평등이 육식이 선포하는 종 불평등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에서 한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겠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문화에서 고기를 수중에 넣는 쪽은 남성이기 때문이다. 고기는 가치 있는 경제 상품이었다. 이 상품을 통제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획득했다. 그리고 남자들이 여성보다 훌륭한 사냥꾼이기 때문에 이 경제적 재화를 통제하는 일도 남자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됐다. 전근대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고기가 차지하는 사회적 비중하고 반비례 관계에 있었다. ― 92쪽
우리에게는 서로 평행선을 그리는 사안들, 곧 여성과 동물에 공통된 억압의 흔적을 추적하고 은유의 문제와 부재 지시 대상의 궤적을 뒤쫓을 수 있는 이론이 필요하다. 나는 대상화, 절단, 소비의 주기를 제안한다. 이 주기가 우리 문화에서 동물 도살과 여성 성폭력을 서로 결합한다고 주장할 생각이다. 대상화는 억압자가 또 다른 어떤 존재를 하나의 대상으로 보게 만든다. 억압자는 이 존재를 대상으로 취급하면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안 돼’라고 말할 수 있는 여성의 자유를 부정하는 성폭행과 살아 숨쉬는 존재인 동물을 죽은 대상으로 전환시키는 도살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과정은 절단, 또는 잔인한 해체, 마지막으로 소비로 이어진다. 앞서 예를 든 대로 남성은 글자 그대로 여성을 먹기도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여성에 관한 가상적 이미지들을 소비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소비란 억압의 이행이며, 자유 의지와 산산이 조각난 정체성이 완전히 소비돼 사라진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주체는 우선 은유를 통해 판단되거나 대상화된다. ― 113~114쪽
잘못된 명칭의 문제는 글자 그대로 또는 상징적으로 이분법적 사고의 이면에 숨겨져 있다. “고기란 죽은 도살된 동물의 살점”이라는 문장이나 “고기는 살인”이라는 좀더 노골적인 문장은 글자 그대로 사실을 말하고 있으며, 상징적 사고하고는 거리가 멀다. 채식주의자의 투쟁 대상의 일부는 상징적으로 사유하기를 좋아하는 사회에서 글자 그대로 문제가 되는 요소다. 글자 그대로 말하자면 채식주의의 메시지와 방법은 지배적인 견해하고 충돌한다. ― 159쪽
이 장에서 나는 ‘중단’이라는 텍스트상의 전략 덕에 현대의 여성 작가들이 소설을 쓰다가 채식주의에 관련된 사건을 이야기 중간에 끌어들일 수 있게 됐다고 주장할 생각이다. 채식주의적 ‘중단’이 생기는 경우는 다음 네 가지 주제에 관련된다. 첫째, 남성의 폭력 행위에 맞선 거부, 둘째, 동물과 여성의 동일시, 셋째, 여성을 지배하는 남성을 향한 거부, 넷째, 여성 억압, 전쟁, 육식으로 구성된 타락한 세계에 맞선 대립항으로서 채식주의, 평화주의, 페미니즘으로 구성된 이상적 세계의 구상이다. ― 239쪽
역사에서, 그리고 문학 작품에서 여성과 채식주의의 동맹 관계는 꽤나 왜곡돼 있다. 그 결과 네트워크를 형성한 페미니스트 채식주의자들 사이의 관계가 제대로 그려지지 못한다. 페미니스트 이론가인 과거의 여성 채식주의자들은 자기가 페미니스트 이론가라는 사실을 숨긴다. 우리는 두 개의 감춰진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감춰진 여성의 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혼동하기 쉬운 동물 행동주의와 여성 채식주의의 역사다. 역사가들과 문학 비평가들이 채식주의를 언급조차 하지 않는 상황이 지금 여성사가 맞닥트린 현실이다. 그러나 역사와 문학 비평에서 일어나는 왜곡은 역사가와 문학 비평가들이 텍스트에서 마주치는 채식주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들이 유지하는 육식을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다. 역사가와 문학 비평가들은 채식주의 신체가 갖는 의미에 관심이 없다. ― 294쪽
인류학적 포르노그래피에 따라 종의 불평등은 젠더 불평등을 전달한다. 삶의 특징으로 보이는 현실은 사실 한쪽으로 향하는 구조다. 광고, 신문 삽화, 포르노그래피와 대중문화의 융합을 통해 반복된 완전한 문화라는 관점은 특수한 관점일 뿐이다. 인류학적 포르노그래피는 남성들이 곳곳에 도사린 여성 혐오에 드러내놓고 결합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사람들은 보통 사적이라고 여기는 대상을 공공연히 소비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은 여성들의 이미지를 깎아내리고 소비하는 행위를 그저 장난스럽고 해롭지 않은 행동(“그냥 농담이야”)으로 만들어버린다(결코 비하는 아니라는 뜻이다). 여성들은 보통 묘사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상처받은 듯 보이지 않아서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솔직해지지 않으면서도 추락한 여성 이미지를 즐길 수 있다. “우리는 그냥 돼지를 보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저 후터스나 펜트하우스에서 밥을 먹을 뿐이다.” “이건 그냥 광고 포스터다.” ― 382~383쪽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