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와 중종은 서로 상부상조하는 관계였다. 조광조는 중종이 자신을 믿고 지켜준다고 믿었고, 중종은 조광조가 자신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 신뢰는 알게 모르게 금이 가고 있었다. 이 금이 본격적으로 커진 계기는 ‘위훈삭제僞勳削除’ 사건이었다. 위훈삭제란 가짜 공신 훈작을 색출하여 박탈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 조정에는 중종반정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훈구파 대신에게 잘 비빈 탓에 공신이 되어 수많은 특권을 누리는 세금 도둑들이 있었다. 조광조는 이들에게 칼을 겨눈 것이다. 의도는 좋았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중종도 개혁 대상이었던 것이다.
위훈 문제는 굉장히 복잡한 사안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실제로 중종반정에 참여한 공신은 30여 명 정도다. 그런데 공신으로 책봉된 사람은 117명으로, 무려 80여 명이나 차이가 난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공신 책봉 자체가 엉터리였기 때문이다.
1부: 1. 고슴도치의 딜레마 - 중종, 조광조, 21~22p
세조는 유난히 술자리에 집착했다.《세조실록》에 ‘술자리’가 언급된 횟수는 무려 467건이다. 《조선왕조실록》을 통틀어서 술자리가 974건 언급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조선 왕조의 술자리 반을 혼자서 해먹었다고 할 수 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세조실록 = 술판 실록’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이쯤 되면 조선왕조실록의 ‘주 酒님’이다. 이 술자리에는 세조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절충안적 성격이 보인다. 우선 그는 칼과 피로 왕을 따냈다는 이미지를 바꾸고 싶었다.
친목을 중시한다는 모습으로 민심을 수습하고 싶었다. 그리고 대신들과 관계를 맺어 불안함을 떨쳐내고자 했다. 세조가 술자리의 힘을 빌려 그들과 화합하려 했다는 이야기는, 달리 말하면 일상생활에서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유독 술자리에서 민감한 국가의 정책을 의논하고, 새로운 학문을 경연했다. 즉 세조의 술자리는 오늘날의 ‘국무회의’였던 것이다. 희한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도 기업이나 정치인의 중요 정책이나 합의가 술자리에서 나오기도 하니 말이다.
1부: 3. 술자리의 목적 - 세조, 55p
사람은 그 직위와 위치에 맞게 처신해야 한다. 하지만 이를 잊는 사람이 참 많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국민에게 총부리를 들이대고, 법을 수호해야 하는 법관이 권력과 사익을 위해 판결을 거래하는 식의 사건이 태연하게 벌어진다. 아마 이러면 이득은 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을 마음으로 따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떡고물이 탐이 나면 모를까. 당연히 떡고물이 권력이기 때문에 끈 떨어지면 끝이다. 이 공식은 현대의 공직자, 정치가, 기업은 물론 일개 샐러리맨에게도 적용된다. 앞서 말했듯 가짜 리더의 수명은 꿀 떨어지면 끝이다.
리더의 힘은 책임을 지는 데서 나오고 리더의 권력은 처신을 잘하는 데서 나온다. 누구보다 눈을 뜨고 변화에 주목해야 하며, 팀의 목적을 부각시켜 주고 그들을 독려해줘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하의 허물은 그대로 돌려주고 자신의 허물까지 부하에게 덮어씌우던 선조는 훌륭한 반면교사다.
3부: 1. 가짜 리더가 빠지는 함정 - 선조, 135~136p
홍국영은 자기 동생에게 당나라 개원례 황조의 비빈 예를 적용, 그녀가 살던 궁에 효휘궁 孝徽宮이라는 궁호와 인명원仁明園이라는 원호를 주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덕분에 1년밖에 못 살고 아들도 못 낳은 후궁의 장례가 당대 최고 신하들의 주도하에 호화롭게 치러졌다. 여기 더해서 공무를 중지하고 26일간 조의를 표하는 절차를 적용했는데, 이는 왕?왕비가 죽었을 때나 적용되는 제도였으니 다른 말이 필요 없다.
충분히 도가 넘은 행위였다. 하지만 홍국영의 야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홍국영은 이후 정조가 후궁을 들이는 것을 끝까지 반대했다. 중전이 자식을 못 낳은 상황이고, 정조의 나이는 20대 중후반인데 무얼 어쩌라는 것인지? 이에 홍국영은 창조적인 답을 내놓았다.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 이인의 아들 상계군을 원빈의 양자로 삼게 한 후 군호를 만들어 붙인 것이다. 그 이름은 완풍군 完豊君. 완풍군이라는 이름은 왕실의 본관인 ‘완산(전주)’, 그리고 홍국영의 가문인 풍산 홍씨의 ‘풍산’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서 만든 것이다.
3부: 3.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거부한 자 - 홍국영, 175p
영조와 박문수는 이렇게 갑갑한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하나의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신뢰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인데, 이 신뢰관계는 ‘서로 간의 대화, 교류를 통해’ 이루어졌다. 영조와 박문수는 세제와 스승 시절부터 탕평책에 대해 토론을 해왔다. 균형 있는 인재 육성을 위한 국가 발전이라는 대계에 공통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속내를 아는 사이니 대놓고 들이받을 수 있는 것이다. 아마 영조는 박문수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진정한 충신이자 탕평을 위한 정확한 통찰력을 가진 인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려운 숙원사업을 하는데 방향성도 같고 통찰력도 있는 인재를 내쳐서야 말이 되는가? 오히려 그의 의견을 더 들을 필요가 있다. 이것이 삿대질을 하고 달려든 그를 한사코 보호한 이유다.
4부 2. 통찰력을 인정받으려면 - 영조· 박문수, 23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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